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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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재난- 그것이 과거 한 때의 상흔이어서, 다시는 반복될 우려가 없는 고정된 박제라고 해도 말이죠- 을 관광상품으로 만든다는 발상, .... 좀 잔인하기도 하고, 곳곳에서 혁신을 강조하는 작금의 비즈니스 세태에 비추어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도 없진 않네요. 여태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작품 세계를 주로 붓끝으로 빚어왔던 윤고은 작가의 작풍에 비추어, 이 신작은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요. 재난 여행이 컨셉이라고 해서,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설정이나 펼쳐질 것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첫 페이지부터 폭풍의 연발로 쏟아지는 리얼리즘 터치 탓에, 초점과 시야를 어디에 둬야 할지가 난처했을 정도였습니다.

"이게 뭐지? 이러다가 또 화성인 등장하는 시츄에이션일까?"
"벌써 '고요나'라는 이름부터가 도로시랜드 진입 예고 제스처란 말이지."

그래도 이런 기대를 접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윤고은이라는 이름, 상표로부터 지레 떠올리는 작풍이란, 다 알고 있던 대로 특유의 풍만하고 풋풋하면서도 선명한 채도의 원더월드, 바로 그의 전개와 담백한 드라마의 버무림이었죠. 그런데 이거 첫 페이지부터가 영 심상치 않습니다. 30대 초반, 모르긴 해도 아직 미모가 시들진 않았을, 동시에 그만큼이나 세계와 자아에 대한 찌들지 않은 시선, 눈빛을 간직했을, "브레인레벨" 과장 고요나, 주인공은 그 등장의 댓바람부터 직장 내에서의 퇴출 위협 전조로 여겨진다는, 김 모 부장의 저열한 성추행 피해자로 우리 앞에 대뜸 디밀어집니다. 이건 그냥 읽어도 좀 충격입니다. 뭐 작품이 첨부터 김영하표나 달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윤고은은 문단에서의 지위나, 우리 일반 독자로부터의 평균적 대접으로나, "아직 애" 레벨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요? 뭐 나중에 그녀다울 새콤한 반전을 예비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전 소설을 다 읽은 후라 결론을 알고 있지만 일단 짐짓 모르쇠 모드로 나가겠습니다) , 그것도 뭐 나쁠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젊은 그녀라서이죠. 만약, 지극한 나이의 방송작가 임성한이 이런다면 어떨까요? 가정법이 아니라 지금 실제로 그러고 있으며, 대충 시청자들의 공감은 이뤄진 바라서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구태여 하지 않겠습니다.

암튼 윤고은은, 재롱을 부려도 괜찮은 나이입니다. 좀 안 하던 짓을, 진지열매를 따 먹고 우리 앞에서 퍼폼 좀 하기로서니, 우리가 이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좀 어색하고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애가 어른짓좀 하기로서니 당혹할 것까진 없습니다. 어른이 체신 없이 애들 짓거릴 하면 그게 문제고 큰일이지만요. 본디 (어린) 여자의 변신은 무죄고, 작가의 변신은 더더군다나 결백합니다. 아닐까요?

거참, 아무리 그러려니 해도, 대뜸 회사(그 이름도 정글이랩니다)에서의 살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질 않나, 질 나쁜 중년남성이기가 당연할 직장 상사의 성추행 모티브가 등장하질 않나(수위도 별반 낮다고 말 못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책을 잘못 골랐나 하는 주저함이 떠나질 않네요. 그녀가 풀어주는 이야기 보따리의 외관이 어떠하건, 이런 자락에서, 통상 가질 법한 엉큼한 상상의 부력을 받아 가며 계속 책장을 넘겨도 되는 걸까요? 조금 가책이 느껴집니다.

고요나는 정말 냉정한 플레이어입니다. 브레인으로 평가는 받아 왔으나, 나이도 들고 감각도 떨어져가는 게 말로는 표현 안 해도 본인이나 타인에게나 어느 정도 살을 쑤시는 현실로 다가오는 판인데, .... 미국의 오랜 격언 중에 그런 게 있죠. "직구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면 체인지업을 시도하라." 대체로, 정직한 실력의 발휘로 직장 내 입지를 다져 왔던 그녀였고, (더 젊은 나이에 벌써 퇴물 취급을 받기 시작하는) 하급 직원들로부터는 존중과 선망의 대상으로 아직도 꼽히는 그녀지만, 심상치않은 분위기는 도처에서 감지됩니다. 퇴물만 골라 괴롭힌다는 오랜 상사(유능한 부하)로부터 더 뚜렷한 신호를 받은 그녀는, 이제 승부수를 던집니다. 일단 고충처리부서에 분위기를 타진하였으나, 차분히 주판알을 팅궈 보니 섣불리 몸을 담글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길이야말로, 사내의 퇴물로 자타공인의 낙인을 찍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채널임을, 그녀는 예민하게 캐치해냅니다.

제가 리얼리즘의 징그러운 발현이라고 한 건, 성희롱을 사내 정치, 약육강식의 수단으로 삼는 타락한 중년 사내의 등장 따위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이라면, 작중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더라도 작가 윤고은의 페르소나 반영 의혹을 벗기 힘듭니다. 이, 아직은 젊고 순수한 태를 털어내지 않은 고요나라는 주인공이, 이런 감당 못할 분위기의 옥죔 속에서, 저런 냉정한 계산 하에 행동 방침을 정할 수 있다는 그 세팅이 섬뜩했고, 이것이 역사와 자연의 정면 투입이라는 본격 장편 구성을 위한 대담한 시도보다 제게는 더 큰 이물감으로 다가왔어요.

김과 고요나는 묘한 지점에서 타협점을 잡습니다. 김 역시 오랜 부하이자 만만찮은 비중의 프로그래머를 함부로, 내키는 대로 다뤘다간 그간의 곡예 진로가 앞을 점치기 힘든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음을 압니다. 고요나는 물론 회사에서의 최소한 현상 유지를 도모하기 위해, 김과의 절연이 엄청난 모험임을 이미 진단한 상태고요.

일종의 냉각기 마련, 혹은 포상을 가장한 전선 재포진을 위해, 김과 고요나는 부하의 해외 여행( 바로 그녀의 솜씨인 재난 여행 코스) 주선 쪽으로 대립 해소의 실마리를 잡습니다. 감당 못할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직장과 인간관계의 대파국이라는 재난을, 가상의 설정으로 엔터테인먼트화한 코스 상품을 통해 모면하겠다는 발상, 이는 도피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영악합니다. 쉽게 말해, 재난으로 재난을 중화하겠다는 거죠.

고요나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자신의 기획에 몸을 맡겨 먼 타국으로 떠나는데, 역사적 재난인 인종청소와 때맞춰 일어난 싱크홀 디재스터로 유명한, 베트남 남단의 무이 섬이 그 배경입니다. 여행 중 일행에게는, 프로그래머로서의 신분을 철저히 숨깁니다. 이는 타인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이기도 하고, 업무 수행을 위한 방편,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 자체의 의미를 다지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니 그 영악함에 혀가 내둘러질 밖에요.

제가 자꾸 찜찜한 마음으로 되뇌는 건, 이 고요나가 정녕 작가 윤고은과 무관한 존재일 수가, 그럴 리가 없다는 점에서입니다. 아니, 대체 그녀의 어느 정신 한 구석에서 이런 캐릭터를 창작해 낼 생각이 났던 걸까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김 같은 이는 차라리 피해의식의 발로이건, 모종의 상해 예방심리이건 여성들이 떠올리고 상상하기 쉬운 캐릭터입니다. 그런 자라면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인, 어찌 보면 흔해서 드문 파충류 같은 존재입니다. 헌데, 고요나 같은 페르소나는 다른 이도 아닌 윤고은의 솜씨로부터 빚어졌기에, 정말이지 실감과 해독이 어려운 미궁 같은 영혼입니다. 미궁이 가는 곳에 미궁의 얽힘이 빚어지고, 곳곳에 파인 싣크홀은 그 미궁의 굽이와 요철을 맞춥니다. 적당히 갈등이 봉합되고 균열이 가라앉았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자초한 낙오(낙오야말로 쿨하게 영악한 그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상태어입니다. "여행사 직원이 어떻게 낙오를 하죠?" 많이 부족한 이야기입니다. "왜 고요나라는 존재가 낙오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긴 거죠?" 이 정도는 되어야 격에 맞습니다)와 끔찍한 재앙은 기묘한 반전과 충격으로, 재앙 이상의 쇼크를 독자에게 안깁니다. 저는 책을 덮으며 그저 이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윤고은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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