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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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그 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기만 하는 분인데, 보면 언제나 근엄하고 무게 있다는 인상을 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업무 능력은 빼어나나, 그런 퍼스낼리티가 호감을 주지 못 하기 때문에, 결국 높은 직위에의 승진은 힘들 것이라고 점치는 동료들이 많죠. 그런데, 이 분이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문을 나섰고, 나오는 골목길에서 저와 어깨가 맞부딪혔죠. "이제 골치깨나 아픈 시비나 신경전이 벌어지겠군. "싶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사실 저보다 나이도 더 연상이시거든요. 참 의외였습니다.


(사례 2)

대 학 때 저의 선배였는데, 역시 별 사교성 없고 성미 까다롭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 잘 부리는 사람이었어요. 안경도 껴서 참 인상까지 비호감을 더했습니다(안경이 유난히 안 어울리는 타입이었습니다. 안경 일반에 대한 매도는 아니구요. 안경은 저도 꼈으니까요). 이 사람이 MT 가서, 술도 안 한 채 그냥 자기 자리 가서 자는 겁니다. 우리는 그 김에 뒷담화깨나 해 댔구요.

다음 날 아침, 이 선배가 전날 지시해 둔 이것저것을, 우리도 같이 늦게 일어난 탓에 하나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잔소리깨나 듣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선배한테 다가가니, 막 부시시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중이더군요.

"저기요 형...."

"어, 그래? 됐다."

안경을 벗은 그의 표정은 참 맑고 착해 보였습니다. 잠시 후 안경을 끼고 나서도, 잠에서 막 깬 그는 정말 선량하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죠.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사례 3)

아 마 한 7년 전쯤 읽은 천계영의 만화 한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과, 대단한 재력을 갖춘 출신의 (요즘 말로) 차도녀와의 옥신각신이 그려진 대목이었는데요. 서로 잘 맞지 않아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던 터에, 우연히 술 한 잔 걸치고 이 차도녀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한 후, 정말 흉금을 트고 대화하는 일이 생깁니다. 알딸딸한 기분에 차도녀는 평소 안 하던 말이나 신세타령을 늘어 놓는데요.

주인공은 그 말은 흘려 들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놓치지 않고 주시합니다.

"표정이 풀리니 제법 귀여운 얼굴이었구나."



아마 제 생각에, 전형적인, 에고에 사로잡힌 인간과, 그 에고를 잠시 잊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인간, 그 둘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게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가 아닐까 합니다(제 경험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요). 둘은 분명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 차이를 느끼건 그렇지 못 하건 간에, 타인에게는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달라질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격한 편차를 드러내는 걸 우리는 흔히 겪습니다.


물 론, 사람이 일관성을 유지 못 한 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이것 말고도 더 극단의 예가 있을 겁니다. 천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기꾼, 공약을 지키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정치인, 곡학아세하는 학자가 다 그런 류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순전히 계산에 의해서,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가면을 바꿔 끼운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와는 거리가 좀 멉니다. 그런 경우라면, 요즘 인기 있는 범죄심리학 도구인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으로 분석하면 되겠죠. 이 책에서 "영적 구루" 톨 레가 이야기하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소수의 악당 유형이 아니라, 평범하고 선량하며 서로가 서로를 닮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무런 악의 없이, 나 외의 또다른 나(톨레는 결론적으로, 그건 독립된 실체가 없으니 우리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대상이라고 규정합니다)에 의해, 참다운 나를 배신하고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그 와중에 타인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와 상처를 주고, 결국 나 자신을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정신병으로까지 몰아가는, 나로부터의 소외, 참된 나와 허상(이를 톨레는 "에고"라고 칭합니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자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힐링의 이슈도, 이 책의 관점에서는 아주 피상적이고 고식적인 해결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병과 상처는, 참다운 자신과, 거듭되는 환경과 상황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막인 "에고"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건데, 이를 건드리지 않고 무슨 치유가 가능하겠습니까? 근본의 문제를 고치면, 자잘한 질환이야 그때그때의 항생제 처방 없이도 발본색원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톨레의 말은 그것입니다. "놓아라, 놓아 버려라!" 무엇을요? 너 자신이 아닌데, 네가 너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자아, 에고"를 저 멀리 떠나 보내라는 겁니다. 확실히, 나 아닌 다른 것이 제 의사(意思)를 가지고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앉아, 나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면 그건 무서운 일이고, 이성적, 과학적인 방도로는 해결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악마에게 possess 되어 무섭고도 가련한 모습으로 변하는 소녀 리건 맥닐처럼요. 결국 무당이나 신부님들을 불러 오는 것말곤 해결책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책에서 얘기하는 건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톨레가 파악하는 "자아, 에고"는, 반복된 체험과 생각, 감정의 덩어리일 뿐 자기 의사를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문제가 심각할 텐데,다행히도 그게 아니라 허깨비에 가까운, 응결된 먼지 덩어리에 가깝다는 게 톨레의 주장입니다.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요? 간단하죠. "Let it go!" 놔 주면 됩니다. 손에 잡지 말고, 놓아 주면 됩니다.


이 책은 일단 프로이트의 심리학 기초를, 과학이 아닌 인문적 수위에서 익힌 교양인(예컨대 이드, 자아, 초자아의 개념 파악이 되신 정도의 분들), 그리고지난 시절 심대한 영향력을 독서인과 대중에 끼쳤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를 읽으신 분이라면, 상당히 두꺼운 편인 분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빠른 속도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읽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톨레가 주장하는 바 "에고"가, 프로이트적 "자아"와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톨레가 이렇게나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데 당연히 아니겠죠), 심지어 톨레의 출발점이 반드시 프로이트 개념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 프로이트식 체계에 익숙한 분이라면 분명 책이 더 빨리 이해될 겁니다. 프롬의 책을 읽은 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톨레가 자기 이름을 바꾼 계기와 대상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해, 프롬의 그 책이 얼마나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까. 이 책은 프롬의 저서에 대해, 그 21세기판 속편으로 불러 줘도 될 만큼입니다.


1980년대에 한국에까지 큰 반향을 몰고 온 크리슈나므르티라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자 류시화 시인은 이 톨레를 두고, 제2의 크리슈나므르티라고 칭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크리슈나므르티 뿐 아니라 그 모든 영적 구루들에 대해, 류시화 시인만큼 권위를 가지고 언급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톨레와 그 사이에, 최소한 스타일상으로는 적지 않은 차이가 놓여 있었다고밖에 말 못 하겠네요. 톨레는 분명,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가 아는 "해탈"을 책 내내 논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시종일관, 앞에서 말한 선배 서구학자들의 분석 틀, 최소한 언어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개념보다는 심상으로 제 할 말을 한 크리슈나므르티와는 달라도 많이 다른 느낌이었어요.

"반복된 체험과 생각, 감정의 덩어리"가 과연 자기의 독립된 의사를 지닌 실체인지 아닌지에도 의문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사랑에 관한 쓸만한 이론>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요, 이 소설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인격이나, 사랑 같은 숭고한 감정도, 단지 반복 패턴의 누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시각에 대해 톨레는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해집니다.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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