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추적자들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의 발칙한 에덴 탐험기
브룩 윌렌스키 랜포드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염두에 두게 되는 기준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1) 표현이나 내용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있다.

2) 유익한 정보, 혹은 도덕적인 가치가 충분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담은, 정말 유쾌하면서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인 간은 흔히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에는, 사랑이라든가 명예와 같은, 한 차원 높은 범주의 다른 상위 욕구로 그 지향이 옮아감은, 심리학의 매슬로우가 이미 밝혀 낸 사실이죠. 그런데 인간은, 가장 고차원의 자아 실현 욕구를 채운 후에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혹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욕구를 여전히 지닙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보이지 않는 피안을 향할 때) 종교적 열정이 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 세계를 향할 때) 극지, 험지, 오지를 찾아 나서는 탐험에의 열정이 되기도 합니다.

책의 테마를 담은 예쁜 책갈피가 딸려 있어요.


이 책은 이 두 가지 욕구와 야망을 둘러싸고, 실존했던 유명인 14명과, 이 14인의 주위를 맴돌거나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각종의 인간 군상이 연출했던 희극, 혹은 비극을 재미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욕구와 물리 세계에서의 모험이 동시에 얽혀 있는 경우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드문 게 당연한데요, 이런 드문 주제를 책 한 권에 관철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성서 속의 주제인 "에덴 동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숱한 논쟁과 소동, 혹은 촌극에 대해 이 책이 망라적으로, 또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 하나로 책 한 권을 다 채운단 말인가? 의문이 들 만도 하지만, 이 책은 정말로 그런 일을 해 내고 있습니다.


첫 째 장은 보스턴 대학의 학장이자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워런의 이야기입니다. 보스턴은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온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고, 현재는 그 도시를 포함한 메사추세츠 주 전체의 성향이 그렇듯 대단히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자 워런이 살았던 19세기만 해도, 엄격한 청교도 교리와 분위기가 정관계를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죠. 헌데 우리는 여기서, 현대 미국 남부를 지배하는 기독교 원리주의 같은 걸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습니다.


그 는 정통 신앙를 고집하되, 최신 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새로운 흐름을 무작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대화가 통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벌여, 마침내 불신자들을 설복시킨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등장한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담론 윤리"가 뭔지 이해를 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역사의 진실을 또박또박 전하고 있으나, 읽는 내내 폭소를 멈출 수 없는 내러티브로 가득 한 이 책에 실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치 챌 수 있지만,... 윌리엄 워런은, "북극에 에덴 동산이 있었다."는, 오늘날의 눈으론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을, 두꺼운 책 한 권에 가득 싣고, 각종의 인용문헌과 증빙을 부가하여 길게 서술하여 보급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주장 하나로, 현대(그의 동시대)에 만연한 불건강하고 불온한 반(反) 기독교 사상을 일소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엄청나게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 뿐이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의 진위를 판단함에 있어 동원하고 있는 기준 중, 1) 직관 2) 권위 3) 논리 의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4) 증거가 부족했고, 이는 이후의 발달한 과학 지식이 결정적으로 오류임을 보이기까지 그런 대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습니다! 자, 에덴 동산이 북극에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직관으로 벌써 이 억설을 기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게 가장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 1장에는 그 외에도, 우리가 북극을 가장 먼저 밟은 인간으로 기억하는 피어리에 대해서도 잠시 나와 있는데, 그가 그런 영예를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로비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종교건 과학이건 탐험이건, 그 진가를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추악한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픈 깨우침으로 다가 왔습니다.



디음 장에 등장하는 사람은 더 재미있습니다. 유 태인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주류 사회에 합류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이런 유태인들은 제법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사람이죠)한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훈육과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프리드리히 델리치라는 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평생을 시달렸던 그는(이는 이 책 저자의 해석일 뿐이며,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라크(옛 메소포타미아)로 달려가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을 해냅니다. 이 로부터 얻어 낸 결론이란, 구약성서란 한갓 고대 바빌론 신화의 표절물에 불과했다는 거죠! 이는 지금 와서야 현대인의 상식이 되었습니다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고히 지배하던 당시의 유럽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순수 학문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자, 상황은 진흙탕싸움으로 변합니다. 저자는 대단히 재미있게도, 이 델리치 역시 황제의 눈에 들어 영달을 도모하던 정치적 인물 그 이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셋 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일감리교의 일파인 "형제단" 소속 목사였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진정 엉뚱하게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어떤 인디언 유적지를 두고, 에덴 동산의 증거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실 이를 둘러 싼 소동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다른 나머지 13인의 촌극에 비해 역사적 중요성 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편이라, 과연 수록될 가치가 있었을 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주민을 집단 학살하고 그 터전을 빼앗아 현재의 삶을 일군 미국인들의 집단 죄의식을 반영하는 작자의 의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다분히 계획적으로, 저자가 보편적 상식에 비추어 더 파격이다 싶은 캐릭터를 점층적으로 배치한 까닭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의 조셉 스미스(현재 한국에도 선교사가 많이 파견되어 있으며, 지난 번 대선 후보였던 미트 롬니의 종교이기도 한 몰몬 교의 창시자입니다)를 제외하면, 이 14인의 인물들은 단순한 에덴 동산의 탐사자,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모순을 그대로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다시 저 위로 돌아가 2장의 델리치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선량한 인격자였으나, 결국 그의 사상은 이후 나치 발호의 한 토양을 마련하게 됩니다. 5장에 나오는 홍콩의 사회운동가 사찬태(謝纘泰)를 통해, 우리는 에덴 동산이 東투르키스탄에 위치해 있다는 식의 황당한 코미디를 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중국 근현대사의 일단인 의화단 운동, 그리고 신해 혁명에 이르는 거대 흐름의 한 지류를 엿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인물들의 현대사적 비중이, 뒤 시대일수록 우리의 감정과 가치관과 교차하거나 혹은 크게 역행하는 요소가 많을 테니,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게 당연할 밖에요. 



알 고 보면 은근 심각한 주제와 도덕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저자의 문장과 위트가 너무도 빼어나서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213~221페이지에 실린 스콥스 재판은, 그 내용상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위트와 자기 패러디가 진하게 배어 있어, 이 책의 압권으로 생각될 만큼이었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을 추려 보면,


p46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가능한 일일지도 → 이런 이슈가 기독교의 신구 종파를 가릴 리 없죠, 종교상의 대립을 풍자한 명 위트였고요.

p141 문명이 끝나려고 하는데(일차 대전 발발 직전) 문명의 기원(에덴동산)을 고려할 여유가 없음은 당연했다. 블랙 유머죠. 학문적 논쟁이라고 해도 결국 소속 국가의 이해를 반영하여 전개되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쓰디쓴 상황을 풍자합니다.

같은 페이지 "한 사람(델리치)은 청력을 잃고, 한 사람(세이스)은 시력을 잃어 대화가 될 지 의문이었다. " 신체상의 기능 장애를 거론하는 게 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성격의 See No Evil 같은 구절이 연상되어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역시, 국가 간의 탐욕으로 인한 전쟁열기를 풍자한 대목입니다. 

p131 "뱀에 물린 그는 뱀의 사악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코미디 대본처럼 웃음이 나왔던 부분입니다.

p213  학장 생일은 그 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고령의 워런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서술하는 부분이 매우 우스웠습니다.


책에는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게 보였습니다.

p58 에 보면 1903년에 오스만(유러피안 페이션트)이 무너졌다고 하고 있으나,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문을 닫습니다. 이 시기는 오히려 술탄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추스리던 시기입니다. p167에 보면 그 이후에 제국이 건재했음이 잘 나와 있고, p180 청년 투르크 당의 혁명을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책 자체만 놓고 봐도 말이 안 되는 서술입니다.

p58에 보면 "토리아"라는 인명이 나오지만, 이런 발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Viktoria는 독일식으로도 그저 "토리아"일 뿐입니다. 독일어라고 해서 V가 언제나 [f]로 발음되는 게 아니며, 이 경우는 외래어이므로 예외입니다.


p172에 보면 "강의로부터 5년 후"라고 되어 있지만 틀렸습니다. 바빌론과 성서(Babel and Bible인데 이걸 독일어로 읽으면 바벨 운트 비벨입니다, 기발하죠)라는 강의는 1902년에 있었으므로, 6년이 정확합니다. p216의 1903년 운운도 틀린 것입니다.


p151의 역자 주 the boxesthe boxers의 잘못입니다.


p63에서 '조엘'은 "요엘' 이 맞을 것입니다.


p297 "바레인은 섬나라였다." 바레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섬나라이므로 과거형 시제는 눈에 거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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