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순례가 놀라운 것은 아니고, 모든 인생 혹은 그 인생의 한 특정 체험이나 여정이 "순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순례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성지(聖地)를 향한 것이라고 해도, 범속하거나 루틴하기가 쉬우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상업적이기까지 합니다. 주변에 종교(어떤 종교라도요)를 믿는 분들이, 성지 순례를 어떤 기분으로 다녀 오고, 또 돌아 오신 후 어떤 영적 고양을 맛보는지 지켜 보시는 분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순례는 아쉽게도 대개는 그 순례자의 before & after에 차이가 없습니다. 순례는 거의 "거듭남"의 효과를 보려 감연한 용기를 내어 행하는 것임에도 불구, 우리는 그저 종래의 안온한 껍데기를 벗어 날 생각를 하지 못한 채, 이 번잡한 여행, 예식을 통해 외관의 대청소를 행하는 데에 그칩니다. 그러니 그게 놀라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상과 체험이 규격화의 편한 틀로 재단되어 생산, 소비되는 요즘, 어떤 감동과 환희도 그저 있을 법한 일,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likely할 뿐입니다.


하물며 더 많은 이들에게는, 살아 왔거나 살아 갈 인생 통째부터가 범속한 일상의 연속이며, 패키지 상품으로서의 원거리 여행조차도 드물게 맞는 전환점일 뿐입니다. 제 두 발로 걸어서, 혹은 대단히 고달픈 전통적 수단에만 의존해서 어느 타방을 다녀 온다든가 하는 일은 좀처럼 겪기 힘듭니다. 만약 누가 그런 체험을 실제로 마쳐 내었거나, 단지 결심만 해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아마 주위로부터 대단히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대단히 unlikely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례라는 이름만 붙었다 뿐 참다운 자아와 궁극자를 발견함과는 거리가 먼 행차, 의식이 그 명칭의 진정성을 배신하기 일쑤인 세상에서, 그저 직장에서의 책무와 할당과업 수행에만 자신의 정력을 봉헌한 인생, 퇴직한 직장으로부터 변변한 보상이나 대우도 받지 못 한 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자신처럼 늙어 버린 아내로부터의 보살핌, 개입, 리딩, 승낙의 연속체에 둘러 싸여 어정쩡한 노년을 맞고 있는 해럴드 프라이 씨에게라면, 더더군다나 무슨 순례 같은 것이 일어날 법하지 않습니다. unlikely는 이처럼 일어날 가망 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또 그 일어난 순례의 내용이 대단히 이색적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정의(定義)를 충족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unlikely한 순례의 촉발 동기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해럴드 프라이 씨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불길하리만치 평범한 어느 날 오전에, 편지 하나를 받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잉글랜드 서남부 중에서도 땅끝이라 할 사우스데본으로, 저 동북 방향으로 그 대척에 자리한 노섬벌랜드의 버윅(-어폰-트위드)로 부터 서신이 도착한 것입니다(잉글랜드의 끝이라고 해도 됨니다. 그 위는 스코틀랜드니까요). 처음에는 무슨 착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던 바로 그 무렵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온 직장에서 고락을 같이하던 동료가, 어느 의료 시설에서 암에 걸려 죽어간다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식을 전해 온 것입니다. 


"여보, 퀴니가 암에 걸렸다는군. 어쩌면 좋지?"

"암은 낫기 힘들어."


아내 모린은 매정하거나 타산에만 밝은 여성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해럴드 자신처럼 그 지루하면서도 잔인하게 단조로운 일상과 숱한 책임으로부터 마모되고 탈진되어 많은 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퀴니란 이름과 존재, 그 불행한 만년의 운명이 동료였던 자신에게만큼이나 큰 충격을 줄 리가 없습니다.


"소용 없어."


어느 새 아내는 편지 발신인을 화제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다시 복귀해. 내일을 어제만큼이라도 안전하게 챙기려면, 오늘에 그제처럼 매몰되야만 하니까.'


그러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더 이상 경화된 나무등걸처럼 루틴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라도 행동에 나서서, 그간 애써 외면해 온 소중한 무엇인가를 먼지구덩이로부터 찾아 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더 불행한 일은, 대체 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죠. 편 지를 쓰고 부치려고 하나, 그는 재게 내딛는걸음 솜씨가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다가 오던 우체통이 그의 목전에 와 닿을 때마다 외면하고 끝내 지나칩니다. '다음 우체통에 넣도록 하지. 아직 수거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는 이러다가 평상에서 결코 닿아 본 적 없는 먼 지점까지 와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한 임시직 종사 소녀로부터 unlikely한 충고를 듣습니다.


"간절히 그것을 바란 적이 있으세요? 이루어 질 수 있다니까요."


여태 아내 모린으로부터 일상의 사소한 일에까지 승낙을 들은 후에야 모종의 실행에 나섰던 그는, 소녀의 이 차분한 넋두리를 벽력 같이 영혼을 때라는 계시(?)로 인지하여, 터무니없는 순례를 걸어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아파 죽어가는 퀴니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살아 있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내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우리는 노인의 결심이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그는 일단 편지부터 부치고 여행을 결행하지 않았을까요? 집에 돌아가서 여장을 꾸린다든가 하는 일은 그 자신의 작중(作中) 해명을 통해, 그 불가한 사유를 우리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지도 못한 채로 며칠을 보낼 수 있는데, 그는 선착의 통보도 없이 기약도 없는 출발부터 무작정 하고 봅니다. 다음으로, 그는 병자를 보겠다면서, 가능한 한 가장 빠른 교통편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시간의 경과로 이미 상대를 산 채로 만나지 못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도보편을 선택합니다. 그 길은, 우리 식으론 아마 목포에서 함흥 정도까지의 거리인 800km, 이천 리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영흥으로 엑소더스를 결행할 때는 최소한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라는 외부 추동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해럴드 프라이 노인은, 그저 영혼의 충격 하나만으로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감행하려 합니다.


그 배경과 내심에 희극적 요소나 정신병리학적 색채가 없다 뿐이지, 상식과 제약 조건에 비추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런 순례에의 출발은, 마치 문호 세르반테스의 "아들'" 돈 키호테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이가 좀 많다 뿐, 그의 정신은 아직 맑습니다. 오히려 그 도덕적 건강성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고양된 상태죠. 그 는 돈 키호테 못지 않게, 그 긴 여정의 사이사이에 참으로 많은 이들과 그 사연을 만나게도 되며,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순례를 구경하는 우리도 덩달아, 갖은 인간 군상의 곡절과 미묘한 심리 일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일즈맨으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세일즈맨이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인정 받건 그렇지 못하건, 불특정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그 생존 최소 조건이 실현되는 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남의 "예스"를 거 치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되는 직종입니다. 이래서, 아서 밀러의 "아들" 윌리 노먼은, 직장에서 번-아웃되고 모기지 상환으로 솔드-아웃된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여 처량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거죠. 우리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말하자면 예정된 추락과 퇴장을 거부하고 반대편을 주시하며 일어서되, 호기나 광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로키 발보아의 정제된 오기로 기적을 꿈꾸는 오디세이를 시작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고 싶지만, 결국 대부분은 초라한 단역으로 소모되어 정해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처분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해럴드 프라이는, 슬프고 부당한 소식을 눈과 영혼으로 접한 후, 그저 해럴드 프라이 자신이 과연 원래 누구였으며, 여태 무엇이었는지 그 하나만 확인하러, 산 채의 동료 퀴니를 만나야겠다는, 기이하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한 채 도보 순례를 떠납니다. 저는 그 결말을 현재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모르는 분들은 이 잔잔하고 다정한 장편에의 순례를 통해 영혼의 정화와 함께 그 호기심을 충족하는 건 어떨지 권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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