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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1 ㅣ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평점 :
좀 이상한 질문을 던져 볼까 합니다. 댄 브라운은 우리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라이터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을 일러 author라고 불러 줘도 될까요? 아무리 순수 미학의 차원을 도외시한 세속적 차원에서의 성공이라고는 하나, 이미 그렇게까지 성공한 이를 두고 새삼 "저술가"라는 호칭에 인색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다수일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부당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단 한 작품의 성공 후 곧 잊혀진 사람도 아니고, 그 이후 그는 그저 로버트 랭던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하나 연작을 잇따라 내어 쏠쏠한 상업적 성취, 대중의 주목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로지 그 자신의 붓끝으로만 이뤄 낸 일입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사가 시작한 이래 펜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의 반열에 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댄 브라운 같은 예는 대단히 드뭅니다. 로마 교황청은 19세기 후반, "교황 무류설" 도그마의 채택으로 전 세계 지성인들로부터 결정적인 외면을 받는 어리석은 실책을 범하기는 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인류 이성의 표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처사를 저지른 적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하며(나치가 발호하던 시절의 논란 많은 자세는, 당대 재임 교황의 개인적 선행도 있고 했으니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요), 전인류적 이슈에 대해 대체로 차분하고 신중한 스탠스를 견지해 왔습니다. 몇몇 교황은 종교와 신앙의 이동, 유무 여부를 떠나 폭 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3년 느닷 발간되어 세계적 히트를 친 소설 <다 빈치 코드>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비난 성명까지 내며 감정적 색채가 다분한 성명까지 내었습니다. 일개 소설에서 펼친 이런저런 주장을 두고, 오랜 역사를 지닌 거대 종교의 핵심 수뇌부가 점잖지 못하게 격떨어지는 성명전을 일 개인과 벌이고 나선 것입니다. 바티칸은 나름대로 절박한 필요에서 취한 액션이었겠으나, 그 결과는 스스로 불러 들인 위신의 추락, 그리고 역설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맞짱을 뜬 신출내기 작가"로, 아직까지는 그 본연의 저력을 의심 받고 있던 댄 브라운이라는 인물을 일약 세계적 차원의 명사로 끌어올린 일이었습니다. 그가 보유한 영향력은 반은 자신의 (나름) 재능, 반은 체신 없는 교회의 과민반응이 합작하여 낳은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거대 종교와 맞선 문인의 다른 예로는 살만 루시디가 있겠습니다만, 화제가 된 사건 이전의 종합적 문단 경력이라든가, 그가 영어를 다루고 어르는 솜씨를 고려하면, 댄 브라운은 감히 그와 비교 대상에 오를 수준이 못 됩니다.
이렇듯 대단한 영향력을 만방에 떨치게 된 그라고 하지만, 여전히 author라는 호칭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붙여 주기에는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는, 그가 구사해 온 문장의 미숙함입니다. 단어의 구사 양태는 대단히 단조롭고, 어휘는 중학생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점이 한국 독자들에게 선명히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안종설씨의 매끄럽고 빼어난 번역이 크게 한몫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오노 나나미가 그 모국어를 공유하는 본향(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공감을 획득한 것이 김석희 선생의 매끄러운 번역에 크게 빚진 사례나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소설 미학적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2000년 <천사와 악마>를 통해 세상에 처음 등장시킨 로버트 랭던은, 어찌 보면 너무 속보이는 "인디애나 존스"의 소설판 짝퉁입니다. 선과 악의 평면적 캐릭터들의 클리셰적 충돌이, 다만 영리한 작가가 미리 예비해 둔 계산적 트위스팅 속에 이리저리 구조적 요동을 이루다가, 다소 의외다 싶은 결말로 독자의 얼을 잠시나마 빼 놓는 수법은, 단테 이래 문명의 햇살이 비추고 도시적 풍요가 넘실대던 공동체에서는 으레 존재했던 재주꾼들이 일찍부터 피우던 재롱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은 자신보다 훨씬 재기 넘치던 선배들이 다져 놓은 평탄한 길을, 요령 좋게 최소 비용 최대 효율의 경로로 얌체 같이 밟아 왔을 뿐입니다. 하다못해 그는, 창의력 면에서, 다른 문화 영역의 흥행사 스필버그의 그늘을 단 한 치도 못 벗어나는, "따라쟁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다 빈치 코드> 역시, 그 핵심의 화제는 모조리 <성혈과 성배>에서 모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 빈치 코드> 이후 10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그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란 운 좋게 한 방으로 뜬 유명인, 연예인 이상의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는 비록 자신이 노리던 거의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는 하지만(그는 대학을 여러 군데 다녔고, 대중 문화 섹터라고 할 수 있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으나 나이를 꽤 먹도록 분명한 커리어를 쌓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그리 높은 위상이 아니지만, 그는 변변한 정교사도 아닌, 부유층 상대의 (학년 등급이 존재하는) 사설 교습소에서 몇몇 언어를 강의한 것 이상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명성이 문필가라는 수단을 통해 얻어진 것이니만큼, 이제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세상에 무엇인가를 선보여야만 했습니다. 또다른 엔터테인먼트 롤러코스터 하나를 내놓은 것에 그쳤다면, 설사 그것이 또다른 상업적 대히트를 부르는 데 성공한다손 쳐도, 장사치나 연예인이 아닌 저술가(author)로서의 체면에는 크게 값하지 못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마땅할 때였다고 저는 생각했는데요.....
이번의 신작 <인페르노>는, 알다시피 단테의 고전 <신곡>의 지옥편에서 그 제목과 모티브를 따 왔습니다. 댄 브라운은 유럽 곳곳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개인적 배경이 있어서인지, 그의 모든 소설은 "유럽 모처에 집도 절도 없이 툭 떨어진 미국 출신의 이방인" 로버트 랭던의 (다소 모성애를 자극하는) 좌충우돌 활약상으로 꾸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 <인페르노>에선 그 색채가 유럽풍의 외피만 빌린 것이 아닌, 르네상스 고전의 인문적 자취에 깊이 천착한 모습입니다. <인페르노>는 단지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에서 그 제목만 빌린 게 아니라, 그 구조와 은유적 함의까지 "애써서" 일개 오락물에 투영하려 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소설의 초두에 등장하는, 지하 동굴의 "호수" 따위의 소재, 그리고 배경으로 등장하는 피렌체(토스카나)의 설정이 다 뭐겠습니까. 이 번에는 댄 브라운 이 사람이, 작심을 하고 중학생용 어드벤처 오락물에 인문의 향취, 고전의 아우라를 욱여 넣고 세상에 그 노력의 산물을 "tada!"하고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데뷔 10년차를 맞아, 나름 거듭남의 고뇌를 세상에 진정성 있게 시연해 보인 것입니다.
진지한 author로 거듭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하필 왜 <인페르노>였을까요? 이는 단테와 이 작품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신곡>은 대단히 깁니다. 이런 장편의 분량과 그 웅대한 스케일에선 아무리 졸렬한 솜씨라 한들, 뭘 빌려도 빌리는 게 가능합니다. 만약 그간 호되게 교계 관계자나 열혈 신도로부터 시달려 온 분풀이를 하고자 함이었으면, 아예 <우신예찬>이나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 효과적이었겠죠. 하지만 이들 작품은 분량이 짧거나, 구조와 내러티브의 규모가 부적합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어드벤처 스토리의 모티브를 빌려 주기에는 모태가 빈약합니다. 다음으로, 댄 브라운은 그저 평탄한 환경에서, 어떤 한 분야에 헌신하는 인생을 지향했다기보다, 딴따라식 설렁설렁 한량 스타일로 그 나이를 먹을 때까지 버텨 온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이 설사 무엇이 제 개인 소신에 반한다 한들, 그 부당함을 세상에 대고 증명해 보이는 식의 투사형 애티튜드를 지니진 않죠. 단테가 누구입니까. 그의 작품 앞에 후세인들이 divine이라는 한정어를 따로 붙여줄 정도였죠. 인문의 자유로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정신은 당대 교회의 교리 훈육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체제 안에서의 최대 자유를 지향한 단테의 마인드를, 일개 예능인인 댄 브라운은 모사하려 한 것입니다. <우신 예찬>에 굳이 빚지려 하지 않은 건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댄 브라운이 <다 빈치 코드>에서 그토록 세계 대중에게 사랑 받은 비결은, 빼어난 이야기솜씨(비록 표현은 단조로우나, 가장 겸손[?]하고 간명한 표현만 구사해서 제 할 말을 다한, 이상한 기교죠)를 보였고, 다음으로 그 반전이라는 게 인문적 상징 체계에 그 기반을 두었다는 개성입니다. 더군다나 그 반전이 폭로하는 결론이라는 게, "알고 보니 전부 너였다!"는,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개인 회귀로 치닫는 점도, 현대인의 치기 어린 나르시즘 그 급소를 치는 면이 있었어요. 그는 내러티브 롤러코스터의 곡률 면에서 시드니 셀던만 못하고, 상상력의 범위와 배경 지식의 스케일 면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의 발 끝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댄 브라운은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상업적 성공을, 최소 비용만을 투자하여 얻어 낸 경영의 대가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빼어난 장사치지 아직도 작가는 아니라고 할 분도 많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댄 브라운 아닌 어떤 신인작가가 쓴 제법 큰 규모의 오락 소설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걷어 낸 신선한 눈초리로, 전체를 다시 스캔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이번 소설은 최소한의 격조가 느껴지고, 파렴치한 중딩 상대 야바위 같다는 인상은 어디서도 안 풍깁니다. 덮어 쓴 인문의 베일도 가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댄 브라운 고유의 노력으로 축적한 개성과 내공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태의 그의 매력은 그것대로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제 최소한 저 개인적으로는, 그를 거리낌 없이, 엔터테이너 아닌, author라고 불러 주고 싶네요. 마치 "효부라 불리운 며느리"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