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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ㅣ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헤르만 헤세 지음, 강영옥 옮김, 김욱동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평점 :
초판본의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이며 양장본입니다. SIDDHARTHA라는 제목 밑에 프락투르 체로 Hermann Hesse라고 쓰였습니다. 그 아래의 문양은 아마도 연꽃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바탕색이 브라운색이라서 더 고급스럽게 보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26에서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대화를 나눕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이지?" 참으로 근원적인 질문이라,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득도(得道)에 가까워진 경지이겠지요. 재미있게도 싯다르타는 청주나 야자유 몇 잔을 마셨을 때 이 비슷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람이 발효된 음료 몇 모금을 마시고 간을 손상해 가며 잠시 느끼는 황홀경이 과연 득도의 경지와 몇 걸음 사이의 가까운 거리일까요? 아직 미숙한 싯다르타는 이 순간 너무 과감한 것 같습니다(이건 그냥 제 느낌이고, 헤세는 벌써 이 나이에 싯다르타가 깨달음 근처까지 갔었음을 암시합니다).
p94에서 싯다르타는 전에 가우타마(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설법을 듣고 스쳐갔던 바를 다시 떠올리며 삼매의 경지에 대해 숙고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싯다르타는 고행, 단식 등을 모두 거쳐 보고 그 덧없음을 새삼 강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도 여기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역사상의 싯다르타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만 이 소설에서는 브라만의 아들로 설정됩니다.
싯다르타는 과연 성인(聖人), 대각(大覺)의 자질을 지녔기에 소년 시절에도 절정의 깨달음 직전까지 갔고, 지금은 카말라 곁에서 부유층의 온갖 호사를 누리며 아랫사람을 부리는 법도 새로 배웁니다. 어떤 경우에나 그는 주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무한히 우월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게 끝이 아님을 감지하고 더 높은 경지를 목말라합니다. p88을 보면 싯다르타는 이 불쌍한 대중을 사랑하면서도 경멸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부처님이 대자대비(大慈大悲)했다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아직 깨닫기 전 단계임도 감안해야 합니다. 왠지 저는 이 단계의 싯다르타는 부처님이라기보다 헤세 자신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소설에는 가우타마라는 대각 성인이 따로 나오고 이가 곧 붓다(p117)입니다. 싯다르타는 그를 흠모하고 따라배우는 열정적인 젊은이라서, 역사적인 그 싯다르타와 바로 동일시할 건 아니고 그냥 소설 속의 캐릭터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부처님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구태여 이렇게 둘로 분리시킨 헤세의 태도가 특이한데, 불교에서 어차피 석가모니 앞에도 부처 여럿이 존재했다고 가르치므로 이게 그 나름 타당성이 있습니다. p117에서 그는 가우타마 같은 절대 성인에게서도 배우고, 한편으로 카말라에게 극한의 성적 환락과 카마스바미에게 상인의 치부술도 배운, 정말 특이한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를 보면 구두수선공 마르틴에게 낮에 나타났던 가난한 이들이 꿈에 신과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것도 나였어."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기독교 신약 마태복음 25:40을 자신의 버전으로 문학화한 것입니다. p132를 보면 그저 평범한 뱃사공과 나그네 모두가 달관 해탈의 경지를 보이며 모두 닮아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주제 아닐까 싶습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 그 이름도 역시 싯다르타인 소년을 데리고 과거를 뉘우치며 가우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완성에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인으로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못 누리는 스스로에 대해 미련이 남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데 그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싯다르타가 끊임없이 정진하고 다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 마침내 그 모든 걸 초극하는 결말은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