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의 팔월
최문희 지음 / 문이당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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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감정이란 참 집요하고 무섭습니다. 사실 값싼 용서는 상대방을 향해 복수할 힘이 더 이상 내게 없다고 판단될 때 못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도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정당한 원한을 갈고 닦아, 그 잘못한 상대가 죗값을 치를 때까지 죽죽 진행하는 게 맞으며, 그리하지 않는다면 본인의 생의 의지가 꺾여 시드는 결과를 맞을 것입니다. p209에도 나 대표 말 중에 "저항할 수 없으면 그냥 구부리고 살라고? 어림없어."라는 게 있습니다(사실 이건 모경인의 말 인용).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 조안의 마음이 또한 그러리라고 독자인 저는 생각합니다. 결말에 가서 과연 조안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끝까지 통독한 독자들만 알고 감동을 받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16에 강문혁에 대한 소개가 사회자 배우정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32세에 하버드 교수로 초빙되었고(영문학), 그럼에도 구태여 한국의 강단에 서기를 고집했다니 뭔가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이어 그의 친구인 모경인 작가, 나주연 대표(출판사)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며 남들이 모를 무슨 사연이 있는 듯도 합니다. "남의 자서전이나 써 주는 대필 작가 주제에!(p31)" 이 말을 듣고 모경인도 격분하여 나 대표의 뺨을 칩니다. 조안은 모경인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녀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언니처럼 조안도 머리가 좋습니다. "의대 공부, 아르바이트, 소설, 거기에 연애까지. 독종이 따로 없어(p86)." 나 대표는 그녀의 완벽주의가 너무도 마음에 듭니다. 배우정은 모경인에 대한 존경심만큼은 틀림없기에 일일이 사소한 일에까지 찌르고 들어가지만(p128), 글쎄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산(泰山)은 모경인이고, 강(江)은 강문혁 자신을 일컫습니다. 문학동아리 멤버들다운 표현이지만 글쎄 속에 무슨 감정들이 오가는지는 남이야 모를 일이죠. 너무나도 반가운 해후이지만(그렇게 보이게 하려고 애쓰지만) 과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들만이 아는 사정이 16년 동안 여러 구비를 틀었습니다. 

배우정은 총신대근처(p154)에 자취방을 얻습니다. ㅎㅎ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제가 거쳤던 장소들과 이 소설의 지명들이 많이 겹쳤기도 해서입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강문혁이라는 인물의 행동반경이 또 그쪽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조안은 나래 시인과 함께 신림동에서 기거하는데 이 소설에는 서울 시내 곳곳의 여러 동네 이름들이 등장해서 더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p27에는 운니동(雲泥洞)이 나오는데, 책에 나오는 대로 월탄 박종화의 몇 소설에 주요 무대로 세팅됩니다. 월탄의 작품 중에 제목이 <흥선대원군>인 건 없고, 전야, 여명, 민족의 3부작이 있습니다. 주소로 운니동이라고는 누구라도 써 본 적이 없고 등기부 등본이나 호적 등본 뗄 때에나 본 적 있을 텐데(그쪽에 연고가 있다면), 운니동은 행정동명으로는 이제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p231에는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지성적인 것과 지성인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림막이 존재한다." 강문혁의 부친 만복(이름도 좋네요ㅋ)은 성공적인 사업가였지만 매우 야만적인 성품이었습니다. 자녀를 낳고 부모의 위치에 섰으면 성욕 정도는 스스로 콘트롤되어야 하는데 참... 그나마 이 사람은 돈이라도 많고 생리적으로 구조가 그렇게 되었기에 일말의 이해라도 되지만 발정난 70노파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꼴인지 원. 불멸을 남용한다는 강문혁의 처지(p244)도 이해는 됩니다. 

소설 대단원으로 치달으며 조안은 강만복과 정면으로 대립합니다. 강 회장은 참 뻔뻔스러운데 이 나이 또래들이 좀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나마 강회장은 어설프게 진보인 척은 안 하는 사람이니 동정은 갑니다만. 문학박사 강문혁은 비명(碑銘)을 "용서받지 못할 자"라며 생전에 스스로 만들었는데(p276), 세상에 진짜 용서 받지 못할 살인자는 따로 있고 아마 그 자식한테 복수의 칼날이 그대로 향할 수도 있겠습니다. 섬뜩하면서도 절절하고 치열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투와 애증이 잘 녹아든 멋진 장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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