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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늬 - 청소년을 디카시집
박예분 지음 / 책고래 / 2024년 12월
평점 :
디지털카메라는 요즘 폰카가 성능이 너무 좋아지다 보니 거의 유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미러리스라든가 하는 하이엔드 품목은 예외입니다만 그런 걸 어린 학생들이 갖기는 쉽지 않죠. 이 시집은 아동문학가이신 박예분 선생이 쓴 작품집인데, 아이처럼 순수한 동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 사실 디카라는 것도 이걸 혹 가진 분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분들일 텐데, 심플하고 과감한 구도로 촬영한 여러 컷들이 함께 실려서 동시 작품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8에는 <저공비행>이라는 작품이 나오는데 이 멋진 사진을 보면 이 책의 메인이 시인지, 아니면 사진인지가 헷갈릴 정도입니다. 하긴 종이를 자르는 게 가위의 윗날 아랫날 중 어느 편인지 구태여 가릴 필요는 없겠죠. 아무튼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활강하는 갈매기와, (사실은 제법 거리를 두었겠으나 광각상 가까워 보이는) 갈매기를 가리키는 팔뚝이 서로 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 사진과 함께 게시된 시도 기가 막히는데, 시에는 갈매기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내 근처를 나는(=비행하는) 심장 폭격기"라는 묵직하고 짧은 구절이 독자에게 충격을 줍니다. 이 컷을 정말 한 마디로 압축하는 시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p94에는 정말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는 작품 <초상권>이 있습니다. "내 사진 함부로 쓰지 마시고 박예분 시인의 디카시(詩)에만 올리세요"라는 구절을 보며 빵터졌는데, 이 사진 작품을 보면 정말로 오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뭔가 사람들을 향해 심각한 당부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시인의 텍스트 작품이 미리 자리를 잡아서 그리 선입견이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사진 작품과 시가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분위기라서 참 절묘한 포착이다 싶었습니다. 하긴 오리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데 자기 얼굴이 아무데나 돌아다닌다면, 또 허락을 받은 작가분 외에 다른 이가 함부로 쓴다면 거 어디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 재방송을 어쩌다 주말에 볼라치면, 입양한 아이를 두고 "가슴으로 낳았다"는 표현이 그 대사에 포함된 걸 가끔 듣습니다.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라도 가슴으로 낳았다는 말이 왠지 찡한데, p119를 보면 시인도 고목나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바로 애기똥풀이라고 하십니다. 수종이 다르니 얘들 사이가 부모자식이 될 수야 없죠. 그러나 지척에 두고 양분을 나눠 가졌으니 뭐 양부모라 못 부를 것도 없는 사이입니다. 또 여기서 제가 묘하게 본 부분도, 애기똥풀이 정말 멀리서 보면 하늘하늘 날개짓하는 나비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화문 아니라 전국 어디에나 있지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인에게는 보편적으로 숭배되는 성웅(聖雄)인데, 아마 차고 계신 그 칼을 칼집에서 뽑으신 적은 없기에(동상이니까) 녹이 슬어서 실제로는 잘 들지 않으리라는 시인의 말은 타당합니다. 그런데 이 동상이 굽어보는, 뛰어노는 아이들(대체로는 초등학교 운동장 소재이겠으므로)과 함께 이 풍경이 평화의 상징이라는 말까지 덧붙었습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고 했으니 이 말은 여러 이유에서 합당합니다.
p212에는 <엄마는 고민 중>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생선 두 두름이 소쿠리에 나누어 담겼는데, 이 사진이 엄마의 고민과 무슨 상관일까. 그런에 다음 페이지네 나오는 "고사리 넣고 지질까, 튀길까, 찜 할까."라는 구절을 보고 아 그렇겠구나 싶었네요. 엄마한테는 덩치는 작아도 싱싱한 이 물고기들이 과연 어떤 요리로 쓰여야 제맛일지, 또 식구들에게 최상의 대접이 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죠! 예술가의 탁월한 안목부터, 가정주부의 가장 소박한 고민까지 두루 압축된 멋진 시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