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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공식 요리책
앤디 루니크.릭 바바 지음, 최경남 옮김, 황의형 감수 / 아르누보 / 2024년 5월
평점 :
작년('23) 6월에 와우(=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공식 요리책을 리뷰했었습니다. 그 서평에도 그런 말을 적었지만, 처음에 저는 가상의 요리에 대한 가상의 레시피를 정리한, 게임 세계관의 디테일 익스텐션인 줄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공식 요리책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약간의 성의와 수고를 들여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먹음직한 요리들이, 작가의 정성어린 게임 일러스트와 함께 맥락을 부여 받았으니, 이제 (내가 해서 먹건, 아니면 타인의 서빙을 받건) 우리는 해당 요리를 먹을 때마다 재미있는 게임 판타지 안에 동참하며 그 풍미를 자체 배가하는 셈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20에는 브론의 비프 브루기뇽이 나옵니다. 브론은 디아블로3 등에 나오는 술집주인(상인. 송아지 여관 주인)입니다. 이 자가 마련한 요리가 비프 브루기뇽인데 걸쭉한 소고기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으며, 스튜답게 함께 들어가는 부재료들이 무척 많습니다. 파슬리, 당근, 마늘 등이 거의 건더기의 반처럼 보이며 국물은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바짝 졸여져 있습니다. 떡볶이 떡처럼 보이는 건 잘 보니 버섯이네요. 이 레시피에서 핵심은 (소고기 다음으로) 에그 누들인데, 면발이 굵고 짧아서 처음엔 갈릭 슬라이스인 줄 알았습니다. 에그 누들의 성패는 버터로 어떻게 면발을 잘 둘러싸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다음에 디아블로 할 때 브론이 과연 얘를 만지작하는지 유심히 지켜볼 생각입니다.
루트 골레인은 디아블로2과 3에 나오는 아라비아풍의 교역지입니다. p41의 서술을 보면 이곳 역시 해적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나옵니다. 돛이 푸른색으로 염색된 이유가 나오는데 꼭 게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지난 역사를 봐도 대체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샥슈카라는 게 이 책에서는 선원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 있었다고 하며, 이 레시피는 아예 "해적선 샥슈카"라고 이름이 붙었습니다. 핵심은 계란노른자가 안 뭉개지게 오븐 위에 풀어져 조리되게 하는 것이며, 흐르는 질감/단단한 노른자 어느 편을 원하느냐에 따라 오븐에서 데우는 시간이 다르다고 합니다. 샥슈카는 치아바타, 바게트처럼 바삭한 빵과 같이 먹어야 제격인가 봅니다.
람 에센(Lam Esen)은 디아블로 유저들이 모를 수가 없는 캐릭터입니다. 늑대의 도시 선술집(Wolf City Tavern)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어머니"는, 이 책 화자인 늙은 테드릭에 따르면 상류층 음식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고 합니다(p77). 이 "어머니"는 이 책의 가상 화자 "식탁의 방랑자 테드릭(Tedric at the table)"의 어머니 냐미를 뜻하며, 게임 중에 나오는 특정 캐릭터도 아니고 릴리트하고는 무관합니다(테드릭도 마찬가지이며, 이 책에서만 마련된 화자입니다). "어머니" 냐미가 상류층 음식에 서투르니 선장 하노스 제로난이 레시피를 건네다 준 적이 있는데(p67), 하노스 제로난이 누구인지 디아블로 유저라고 해도 잘 모를 것입니다. 게임이 아니라 (나중에 나온) 디아블로 소설판에 이 캐릭터가 나옵니다.
이 책에는 유독 소고기가 주재료인 레시피가 많이 보이는데(p97이라든가) 본래 지중해 세계에서는 동아시아 등에 비해 우육을 많이 섭취했던 문화의 영향이 있어서이겠습니다. p143에는 고산지 토끼 프리카세가 나오는데 프리카세(fricassee)는 보통 닭고기로 만들죠. 고산토끼는 아마 특별한 육질의 픙미가 있는 듯합니다. 이 레시피들의 배경이 되는 "검은갈매기 선술집"은, 책에 의하면 마로웬, 스코스글렌에 위치하나 본데 전 게임 하면서 본 적은 없습니다. 아무튼 이 챕터가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많았습니다. 먹어 본 메뉴는 하나도 없었고요. 제겐 그야말로 게임 안에서나 볼 법한 메뉴였다고 할지.
p183에는 뱀 쿠키가 나오는데 디아블로 유저들은 아마 뱀 하면 낭가리가 바로 생각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쿠키가 정말로 뱀 고기로 만드는 건 아닙니다. 뱀이 무섭다면 p163의 "평원 쇼트브레드 쿠키"를 대신 시도해 볼만한데 이게 이스트를 안 넣는 게 핵심이라고 책에 나오네요. 책은 늙은 테드릭의 다분히 낭만적이며 비장하게도 들리는 인사로 마무리되는데, 테이블들을 순회하며 세계 각처의 미식을(스스로 말했듯이, 꼭 상류층의 품격에 맞는 것들뿐 아니라 서민적이고 따스한 종류도 많습니다) 즐기는 노인의 팔자가 부럽기도 합니다. 부러우면 레시피들대로 한번 시도해 봐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