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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전쟁 - 세계 경제 패권을 향한, 최신 개정판
왕양 지음, 김태일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9월
평점 :
왕양(王暘)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국 안에서 영향력이 큰 필자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2010년, 한국인들은 여태까지의 미국, 서유럽 중심의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어떤 움직이지 않는 천체의 고정점처럼 보였던 달러 패권의 공고한 왕좌에도 허점이 존재함을 비로소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아직 GDP 기준으로 미국을 확실히 추월하지 못했으며, 저 당시에 예측되던 바와는 달리 많은 경제적 곤란을 겪는 중입니다. 그간 중국과 긴밀히 엮인 바 컸던지, 미국도 중국과 단절을 꾀하면서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고통을 4년 동안 호되게 치렀고, 이제 거꾸로 실업률 상승으로 경제가 신음할 게 염려되는 판입니다. 14년 전의 화제작을 지금 이 시점에서 읽어 보면 어떤 느낌일지, 앞으로의 세계 경제가 어떤 지평에서 재정립될지 우리 모두가 모종의 통찰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20세기 중반 미국이 아직 자국의 돈을 금(金)과 태환(兌換)해 주고 있었을 때, 책 p66에 나오는 대로 세계는 고정 환율 체제를 채택했었습니다. 하루하루 시장에서 변덕을 부리는 환율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기업은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에 어떻게 행동할지 분명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죠. 각국 정부들도 마찬가지여서, 예컨대 1990년 영국을, 1997년 한국과 동남아를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몰고가며 큰 돈을 벌었던 조지 소로스(p272) 같은 똑똑한 악마가 행여 우리 재정의 빈틈을 노리지는 않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비상시에는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 수 있다"며 고정환율제를 비판하지만 문제는 각국의 방만한 재정 운용과 허약한 경제 체질에 있지 환율제도가 촉발하는 건 아니겠습니다. 물론 이제는 변동환율제로 계속 가야 하며 억지 평화와 균형을 내세워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p92에는 러너의 대칭 정리가 소개되는데 이미 1930년대에 보호무역 정책은 큰 소용이 없음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저때 같으면 대공황의 여파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 중심으로 블럭을 형성하여 타국 재화의 수입을 차단하는 근시안적 정책 때문에 결국 모두가 더욱 가난해지는 길로 치닫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9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표를 얻기 위해 외국 상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겠다, 아예 수입을 막아버리겠다며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어리석은 공약을 남발하며 경쟁 중입니다. 이 책에서도 다시 정리하듯, 수입의 인위적 억제는 결국 국내 후생의 감소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며, 정강의 변을 통해 북송을 멸망시키고 광대한 북중국(회수 이북)을 직접 통치한 최초의 정복 왕조였습니다. 전쟁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으나, 치국(治國)에는 매우 서툴러서, 지폐를 마구 찍어 재정을 충당하는 통에 경제가 붕괴될 지경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부(富)와 자원을 남송으로 옮겨 두었고 마침내는 경제활동인구 자체가 남쪽으로 옮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남송은 무력 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에 없던 번영을 누렸으며, 이 활황은 몽골이 침략해 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책 p122에서는, 몽골이 금나라에 가한 치명적인 공격은 군사적 측면에서라기보다, 전쟁 준비를 위해 지폐를 남발하게 만든 경제적 타격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까지 합니다. 그런 몽골조차 백여 년 후 멸망할 때에는 역시 교초의 남발이 문제였었으니 진정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명나라는 기록에 의하면 남동아프리카 일대의 조공을 받을 만큼 세조 영락제 대(代)의 해상 원정이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이후에는 못난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으니, 대체 그 움츠려듦의 원인이 무엇인지 많은 학자들이 궁금해했습니다. 책 p140에도 나오듯 명 조정은 은(銀)의 유출을 우려했고, 몇백 년 후 아편전쟁의 발발 과정에서 보듯 이런 우려는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명은 물산이 다양하고 풍부했으니 구태여 외국과의 교역이 불필요했고 아직 타 세계는 그 총생산규모가 명에 비교도 되지 않았으니 이런 정책이 수긍이 가는 바도 있습니다.
은(銀)은 적절히 귀했고 금처럼 너무 드물지도 않았기에 화폐로 유통되기 적절했습니다. 명, 청에서 지속적으로 은본위제를 택했기에, 일본의 막부에서 어쩌다 은광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대호황이 이어지기도 한 것입니다. 책 p148에서는 그처럼이나 일찍부터 은을 표준으로 삼았던 중국이 왜 18세기 이후 외국과의 무역에서 열위에 놓였는지에 대해, 청 정부가 발행한 은화의 순도가 너무도 빈약하거나 일정치 못해서, 오히려 외국이 발행한 은화에도 유통 선호도가 밀리는 결과가 빚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짓거리는 과거 금나라나 몽골이 저질렀던 바보짓을, 수백 년이 지나서 기어이 반복한 것이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20세기에도 이런 과오는 공간배경만을 달리하여 반복되는데, 아르헨티나는 대체 국가 모라토리엄을 몇번이나 선언했는지 모릅니다. 빚을 못 갚게 되면 모라토리엄, 모라토리엄... 그때마다 아르헨티나의 페소는 리셋되었는데 이름만 같은 페소이지 ISO 4217에 등록된 아르헨티나 페소는 현행이 네번째입니다. 통화단위를 네 번이나 갈아엎었으니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추락했겠습니까.
이 책에서는 조지 소로스 같은 자가 아시아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능력이 없었고, 그에 대한 악평은 일종의 음모론이거나, 아니면 어떤 거대한 세력이 따로 그의 배후에 존재했으리라 진단합니다. p287에서는 롱텀캐피털이 그렇게 무너진 데 대해 러시아가 뒤통수를 쳐서라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투기자본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리 강력하지 않고, 무기력한 개미 눈에만 커 보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제롬 파월에 비해 이십 년 전 의장이었던 그린스펀은 엄청난 능력자로 여겨졌으나,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야기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에게도 책임(p322)이 있는지 모릅니다. 실물의 그림자로만 여겨진 화폐가 부리는 마법이란 실로 강력하며 변화무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