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균렬 교수의 인문핵 - 인문학으로 본 원자핵 ㅣ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3
서균렬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6월
평점 :
저자 서균렬 교수께서는 한국 원자핵공학계의 권위자 중 한 분이십니다. 지금은 의치한약수 열풍이 불어 공과대학 선호도가 많이 낮아졌지만 과거에는 우수한 두뇌들이 대거 공대를 진학했었고, 특히 서울대의 경우 원자핵공학과의 입결이 대단히 높았었습니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 중에서도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내셨고 어린 나이에 MIT에 진학하셔서 우수한 성적으로 국위 선양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서 교수께서는 저때에도, 문과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에 관심을 보이셨고, 지금 우리 독자들도 아는 대로 그 깊이 있는 인문적 소양이 벌써 저때 맹아를 드러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여튼 핵공학자가 풀어 주는 인문 이야기란 벌써 그 서두만 들어도 흥미롭습니다.
"미숙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미술가는 훔친다(p42)." 피카소의 말입니다. 사실 훔친다는 말에는, 그걸 훔쳐서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다(제2의 예술품을 새롭게 세상에 내놓는다)는 자신감이 깔린 말이지, 정말로 창의성 0이면서 뻔뻔스럽게 뭘 내세우기만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겠습니다(이런 나쁜 인간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원시 예술(일단 이런 명칭을 쓰겠습니다)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논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개성과 논리가 새로이 이식되었습니다.
p43을 보면 한국 핵공학 1세대 개척자들이신 임창생, 강창순 같은 원로들의 성함이 열거됩니다. 이분들, 또 저자 서 명예교수님은 남의 기술을 그저 훔쳐 오신 분들이겠습니까? 솜씨가 나쁘면 훔친 기술을 새로운 환경(한국)에서 써먹지도 못합니다. 43쪽의 "우리 실정에 맞게 정착"이라는 대목을 눈여겨 보십시오. 공학자의 천재성은 저렇게 현지적응성, 응용력에서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 핵시설 수출 시장에서 프랑스를 꺾고 맹활약하지 않습니까. 우리만의 기여가 생겼음을 이제 국제 사회가 다 인정하는 겁니다. 전에 뿌린 게 있어야 지금 거둘 게 생기는 법이지 않습니까.
"나라가 부르고 겨레가 찾으면 불새가 되어서라도 날아가겠다.(p57)" 이 멋진 말은 과연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의 입에서 나올 만한 표현입니다. 물리학, 화학 등이 괜히 기초과학이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응용공학에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결과만 반복학습을 통해 익히는 정도로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한다?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실무에서 정말 까다로운 부분은 매번 뭐가 튀어나와도 나오는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요리조리 닷지(dodge)해 나가느냐 하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이런 건 공부머리를 넘어 거의 일머리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일류 엔지니어들은 그저 공부만 파는 너드들이 아니라 거의 준 경영자라 할 수 있는 인재들입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교수님은, 원자핵공학에서 정말 중요한 소양은 물리학 뼈대 중 하나인 유체역학이라고 합니다.
p65를 보면 스리마일 사고가 언급됩니다. 구 소련에 체르노빌이 있었다면 미국에선 그에 앞서 스리마일이 있었죠. 이런 이야기를 보면 교수님은 참 혜안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이제 미국은 글렀으니, 핵 선진국인 프랑스로 가야겠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래도 미국이 떠오르는 태양(1970년대)이니 정치적 기류가 바뀔 걸 기다리려고 마음먹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청출어람이라고, 저랬던 프랑스를 이번에 우리가 수주전에서 이겼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선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황태자의 첫사랑> 무대였던 하이델베르크에 들르셨던 추억도 있고, 아름다운 사모님 미모에 끌려 미군[駐獨]들이 접근한 사연 등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처럼 공부 잘하면 예쁜 반려자가 생길 가능성이 크니 서균렬 교수님처럼 열심히들 해야 하겠습니다!
책 앞에서도 프린시피아라는 이름(물론 뉴턴의, 라틴어로 쓰인 과학 고전에서 따온 이름)이 나왔는데 p104에 본격적으로 그 연구소가 세상에 어떻게 나왔는지가 잘 설명됩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좋은 이름은 일차원적으로만 좋은 뜻을 가지는 게 아니라, 이리 읽어도 저리 보아도 또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다차원의 서기(瑞氣)를 풍깁니다. 괜히 작명소를 철학관(?)이라고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인문이란 본디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대 맥락을 짚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그 원작 논픽션은 십수년 전에 우리말로도 이미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 후반부는 영화보다 재미있게, 20세기 후반 핵공학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세계의 모습 자체를 바꿔 놓았는지가 설명됩니다. 역시 천재는 그 입으로 뭘 설명해 줘도 자연스러운 흥이 전체를 지배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