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페이스
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침없는 상상력, 여태 백인 문화권이 일궈놓은 모든 문학적 성취를 기발하게 비웃고 뒤틀어놓으며, 헌정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을 현란한 말빨로 (영어권) 독자들의 혼을 빼놓은 MZ 작가 R F 쿠앙의 최신작(작년 출판)입니다. 이 책 앞날개에도 그녀의 출세작 <양귀비 전쟁>이 잠시 언급되었는데 그걸 쿠앙이 스물두 살 때 쓴 겁니다(이 작품 중 p166 하단도 참조) . 우리 나라에서는 저 <양귀비...>가 마치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처럼 청소년 판타지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향도 있는데, 그렇게 읽을 수도 있으나 쿠앙의 책은 더 중층적인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다릅니다. 쿠앙의 작품들을 그리 대접해도 된다는 점, 이 <옐로페이스>가 증명했다고 해도 될 것 같네요. 쿠앙의 성씨는 한자로 匡(광)이라고 쓰는데 송 태조 조광윤의 휘 일부와 같습니다. 참고로, p208에 키큰양귀비 증후군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출판은 느리게 진행된다(p60)." 예나 지금이나 출판 산업의 생리가 그러한 듯도 합니다. 출판 산업은 엔터테인먼트업계만큼이나 대단한 모험 산업이고, 출판사가 관리하거나 컨택하는 여러 작가들은 마치 연예계의 가수나 배우처럼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자산이자 골칫덩이들입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각종 뉴미디어, 개인 소셜 계정 등이 등장함으로써 업계 경영자들이 고려에 넣어야 하는 변수는 훨씬 많아졌습니다. 

p61에는 대단히 속물적 어조로 1인칭 화자 준 헤이워드가 언제나 신경 쓰는(지가 왜?) 메이저 5대 출판사가 언급되는데 버젓이 현실에 존재하는 곳들을 실명으로 저리 늘어놓는 태도가 뻔뻔스럽습니다 ㅋ 사실 더 웃긴 건, 이 작품이 아테나 리우와 주인공과의 관계를 마치 디키 그린리프와 톰 리플리의 그것처럼 설정했는데, 누가 봐도 아테나가 작가 쿠앙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소수 인종 출신이 백인 스타를 언제나 선망하는 처량한 신세를 정반대로 뒤집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흠. 

"아마존이나 굿리즈(Goodreads.com)는 물론이고... 하트가 쌓이는 걸 보니 출간일에 늘 그토록 원했던 세로토닌이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p113)." 이런 게 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발랄하게 움직이되 최소한의 체면이나 무게는 잡으려 들었던 출판계나 작가들한테서 상상 못 했던 분위기입니다. 굿리즈에는 물론 좋은 리뷰도 많으나 자극적인 언사를 써 가며 주목만 받으려 들거나 아예 리뷰 등록의 의도가 의심되는 출판 홍위병 같은 유저도 있습니다. 하트고 뭐고 작가나 편집인이 과연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는 게 맞는지, 이래서야 참된 시대정신이 현창되는 걸작, 세월의 풍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명작이 나올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스 사이공>은, 마케팅 용어로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며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됩니다. 그런데 코믹하게도 p178에서는  "조지타운에 있는 한 베트남 커피숍"에서 서빙하는 메뉴(커피)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참고로 작가 쿠앙은 조지타운대 출신인데 실제로 학교 근처에 이런 커피숍이 있지 않았겠냐고 독자인 제가 멋대로 짐작해 봅니다. 아, 아무튼 이 장면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처럼, 마치 패리스 힐튼을 쫓아다니며 유명한 걸로 유명하던 킴 카다시안이 진짜로 셀럽이 되었듯, 준 헤이워드도 도둑질(참고로, 펄 벅의 <대지>에서 주인공 왕룽도 처음에 우연한 도둑질로 부자가 되었더랬죠)로 이제 스타덤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악플러의 괴롭힘 등 셀럽 오서의 불쾌한 숙명 역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p308의 캔슬 컬처 역시 좌우 불문 심각한 악습입니다. 

한국의 전상국 작가가 쓴 풍자적 단편 <달평씨의 두번째 죽음>의 내용도 그렇지만, 대중의 관심이나 호기심, 인기란 대단히 변덕스럽고 무상한 것입니다. 셀럽이나 셀럽호소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제 내 밑천이 바닥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없는 말도 지어내어서, 예를 들어 내가 성희롱을 당했다 성범죄의 피해자다 어떻다 하며 아예 스토리를 날조해 대는, 빤한 작태의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죠(p381에 약간의 반전이 있을 듯도 한데...). 자, p285에서는 드디어 충격적인 실상이 드러납니다. 도둑계의 상도덕 1번은 장물을 또 훔치지 않는다는 거라는데(물론 그런 건 있지도 않습니다), 글쟁이라는 사람들이 알고보니 그 직업윤리가 도둑만도 못했던 거죠. 이제 준 헤이워드는 원죄의 사함을 받은 것일까요? 

"훔치려면 좀 나은 걸 훔쳤어야지!(p362)" 음식점 사장님들도 별 한 개짜리 리뷰만 보면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는데 아마존 자기 책에 ★가 융단폭격된 걸 보면 게슈탈트가 녹아내리겠죠. "준 헤이워드는 반드시 속죄해야 한다." 어디, 참회의 AV라도 찍으라는 걸까요?(백인 장르도 있습니다) p363에 본문 중 설명으로도 나오지만 미디엄닷컴이라는 출판 플랫폼이 실제로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작가 백용운의 <상두놀이>라는 작품을 리뷰했었는데, 그 작품의 플롯도 살짝 생각났습니다. "뒤에 땅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허공이었다.(p427)" 출판계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국면이, 알고보면 이와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