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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흐르고 싶다
이만수 지음 / 카리스 / 2023년 1월
평점 :
사람에게는 많은 땅이 필요한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둘은 톨스토이 우화집에 실린 작품들의 제목이며 그는 작품 안에서 자신의 답을 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p26 <삶의 이유>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하나는 "내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할 이유"라고 합니다. 나는 배를 채울 많은 빵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앞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큰 재산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대체 내가 왜 이 시각 이 지점에 두 발을 디디고 서야 하는지 그 이유가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시니컬한 철학자가 말했듯, 아무 이유 없고 그저 툭 던져졌을 뿐이라면, 이제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사라졌습니다. 그럼 존재가 한순간에 휙 하고 없어져도, 나는 아무 아쉬움도 미련도 서러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이냐? 신이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를 이렇게 여기다 빚었다는 확신, 소명감입니다.
이 시집의 제목은 "강물처럼 흐르고 싶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시집 전체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p48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우리들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심장이며, 존재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의 엔진입니다. 과연 그래서 작품의 제3행이 "강물처럼 흐르고 싶다"이기도 합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보면 꿈꿀 수 없는 걸 꿈꾸고, 견딜 수 없는 걸 견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붙들 수 없는 걸 붙들려 하고, 막을 수 없는 걸 막으려 하는" 인간의 미련(未練)과 미련스러움이 그 모든 시름을 낳는다고 합니다(물론 세르반테스의 취지는, 반대로 인간의 위대함을 지적함이지만). 그리스도가 이른, 들판의 꽃은 길쌈을 않아도 솔로몬보다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공중의 새들도 주님이 거두어먹인다는 구절(마태 6:26 이하)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예수는 진리를 얻기 위해 광야(wilderness)에서 40일 간 고행했는데 p92에서 시인은 이를 두고 사투(死鬪)라 표현합니다. 단지 혹독한 더위, 추위, 굶주림이 문제가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악마의 교란, 유혹, 모든 걸 포기하고 타락하라는 손길 등이 그리스도를 극한의 괴로움에 들게 합니다. 빌라도 앞에서 받은 태형, 그리고 그다음날 집행된 십자가형 등을 위한 리허설이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사람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인간의 육신을 한 그리스도가 가장 배고플 때 떡 한 트럭을 들고 나타나 원초적 욕구를 파고든 중상자(the diabolic)가 보기 좋게 실패하는 장면입니다. "동구를 응시할 아버지"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올 탕아(the prodigal son)을 기다리는 그 부친을 가리키겠습니다.
책날개에는 저자 이만수 목사님이 1953년생이시라고 나옵니다. 사실 자신과 한참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연도로부터 나이가 직감적으로 잘 계산하려 들지 않기에 예사로 봐넘겼으나, p124에 <칠순을 넘기면서>라는 작품을 읽고 엥?하며 시인의 연세를 다시 세어 보았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조훈현 9단,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 차범근, IOC 위원장 토마스 바흐 등과 동갑이십니다. 목사님 같은 분도 더 성실히, 더 정직하게, 더 경건하게 살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으시는가 봅니다. 그러나 과오는 과오대로 인정하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자신에게 남은 소명이라고 단호히 선언하는 게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미련이 남지 않는다는 것." 어느 막장드라마 시청 중 들은 대사인데(출처를 정확히 알지만 여기 적지는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이에 공감 크게 못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무엇을, 활활 타오르도록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겠습니다. "버림으로써 얻고, 썩어야만 거둘 수 있어(p158)" 그리스도는 손바닥에 못이 꽝꽝 박히고 구속 사업을 완수했습니다. 이보다 더 열렬하고 완전한 헌신과 사랑은 없을 텐데 그나마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였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삭혀둔 그리움은 동토(凍土)를 비집고 나오는 새싹처럼 또렷이 고개를 드는(p186) 것입니다. 모든 중생의 구원과 영생을 다짐하며.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