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행위 - 문학 노트 오에 컬렉션 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상민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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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오에 겐자부로는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일본인으로서는 역대 두번째였으며(첫번째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시아인으로서는 세번째였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마치 보들레르나 단눈치오, DH 로렌스처럼 그 특유의 탐미주의로 승부를 본 작가였던 데 반해, 오에 선생은 톨스토이에 비견될 만큼 작품 속에서 사상적 깊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우리 민족이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오에 겐자부로라고 하면 단순하게 반전 사상이나  평화주의를 즐겨 주제로 삼은 작가로만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꾼이라고 할 만큼 꽤나 다작을 한 분이며, 또 그 주제의식도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넓은 스펙트럼을 이룹니다. 지금 이 오에 컬렉션에서도 볼 수 있는 대로, 선생은 심지어 소설 이론, 작법, 평론 면에서도 뛰어난 식견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논의를 전개하기도 합니다. 과연 동경대를 졸업한 엘리트 답습니다. 책 표지에 나온 그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그 표정과 풍모에 지혜와 통찰력, 인간적 품위가 빛납니다. 사람의 가치를 외모로만 평가할 일은 물론 아니지만, 오에 선생의 경우 그 내면의 공력이 쌓이고 쌓여 저런 겉모습으로 자연스레 표출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p37을 보면 오에 선생은 장폴 사르트르가 모리아크에 대해 전개한 비판에 대해 언급합니다. 자, 이 논쟁은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오에 겐자부로보다 대략 십 년 정도 연상입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사르트르보다 이십 년 먼저 태어났고, 안정된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 하에서 이미 보수 성향의 독자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얻었으며,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가톨릭 작가"라고 한 마디로 후려치기도 합니다. 사르트르는 일찍부터 부르주아를 두고 "더러운 자식들"이라 불렀을 만큼 프랑스의 중산계급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을 표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르트르의 눈에, 구시대 잔재 같은 모리아크의 작품이나 문학관이 어떻게 보였을지야 불을 보듯 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리아크와 사르트르의 당시 논쟁은 사르트르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전(全) 프랑스 교수 자격 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한 불세출의 천재, 우리로 치면 율곡 이이 같은 사람을, 양순하고 온화한 모리아크가 무슨 수로 말빨로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오에 선생은 사르트르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 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을 제기했음을 지적하는 겁니다. 그래서 "새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반복 인용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선생 자신이, 그 디테일에 다해 동의를 하지 못하겠는데 무슨 반복까지나 할 의욕이 들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사르트르의 주장에 대해 뭘 반박까지나 할 생각은 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저 워딩이 그렇게 나왔을 뿐, 사르트르의 본심은(의도는) 그 지점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선해(善解)를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리 시대를 뒤흔든 천재의 생각이라 해도 오류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를 꼬투리잡아 비판하기보다는 건전한 상식의 범주 안에서 어떤 수정, 혹은 해석의 범주에 맡기는 게 좋지 않냐고 제안하는 선생의 인격적 원숙미와 날카로운 지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의 본질은 자유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보다 중요한 게 인간 정신의 자유인데 고작 소설의 시점(視點. perspective)을 논하면서 리고리즘(rigorism) 따위가 왜 작동하냐는 취지 아니겠습니까. 문학 안에서는 신(神)도 상대적인 신에 불과하니 그 역시 자유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이런 오에 선생의 문학관으로부터 그의 평화주의, 인도주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연역된다는 점도 우리는 재확인합니다. 

우리가 그 존재 자체를 동요시킬 만한 짜릿한 체험을 하고서도, 이를 차마 말로 표현할 길 없어 답답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p42에서 선생은 (스스로가 언어의 마술사이면서도) 그 체험의 온전함, 완결성이 언어로 변용되는 중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애써 표현하지 않고 그 느낌만을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간직하기만 했다고도 고백합니다. 이런 대목을 보면 누가 뭐래도 그는 여느 유미주의자 못지 않은 예술가입니다. 또 차마 말로 진리의 순일성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삼감의 자세에서 마치 석가모니와 제자 마하가섭 사이에 오간 심심상인, 불립문자, 염화시중의 경지도 느껴집니다. 

톨스토이나 위고처럼 웅대한 양심과 도덕을 논하는 문학에서 아마 문체의 아름다움은 부차적 과제로 여겨질 것 같지만 실제로 저들 거장들은 문체마저도 웬만한 문학가들을 압도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오에 선생은 특히 p70 이하에서 "문체라는 문제"에 대해 자세히 논합니다. 여기서 오에는 문체(文體. style)란 언제나 현재의 문제이며, 문학 안에서 생성되는 세계의 핍진성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의 현재성까지 달성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읽어 보면 선생은 정말로 진보적인 분입니다. 어떻게 독자의 현재성까지 담보한다는 걸까요? 여기에서도 자유가 등장합니다. 작품이 언제 쓰였건, 이를 "현재" 읽는 독자는 그 상상력을 바로 지금에 이르러 해방하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명쾌하고도 논리적 타당성까지 갖춘 언명입니다. 

오에 선생은 p139에서 심지어 성(性)의 문제까지 논급합니다. 선생은, 인간이 성에 대해 갖게 되는 심리의 이면에 자기 부정의 동기가 깔렸다고 추정합니다. 선생은 이 대목에서 주로 성적 일탈을 예거하며, 한평생 규범을 지키며 잘 살아온 사람이 느닷 모두로부터 지탄 받는 성범죄를 저질러 그야말로 한순간에 동료들로부터 지탄받고 사회로부터 퇴장하니 이것이 자기부정 심리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애초에 교미는 자기 후손을 남기려는 목적인데, 본 개체의 사멸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면 애초에 후손도 필요없는 법이죠. 

그래서, 소설을 쓰는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특히나 이 책 p159에서 오에 선생은 그에 대한 해답을 단정적으로 내놓습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창조 현장에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다." 책 전체를 통해 선생은 글쓰기의 "이중성" 효과를 강조합니다. 작가는 언어를 통해 가상의 세계를 빚고, 그 작품은 다시 사람들 사이에 읽힘으로써 세상을 개조하고... 마치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도 생각나게 하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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