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의 대각선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늘이 어째서 나를 내고서 또 oo을 내었던가? 같은 탄식은 <삼국연의>에서 오의 주유가 촉의 제갈량을 두고 내뱉었던 말이 그 최초입니다. 실제 역사나 문학에서 이런 영혼의 맞수들은, 대개 서로를 자신처럼 잘 이해하기에, 비록 친구는 아니라도 alter ego의 관계라고는 부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라면 1995년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에서 빈센트(알 파치노)와 닐(로버트 드 니로), 2007년 작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프랭크(덴젤 워싱턴)와 리치(러셀 크로) 등은, 서로가 쫓고 쫓기는 자라는 대척의 포지션이라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깊이 공감하고 존중합니다. 이 2권 p126에는 뒤퐁과 푸르니에사를로베즈 사이의 라이벌리가 나오는데, 미국에서는 애런 버(Burr)와 알렉산더 해밀튼 사이의 결투가 또 유명하죠. 

지금 이 소설에서 필생의 맞수가 되어 버린 니콜과 모니카는, 비록 어떤 특수한 지점에서 서로를 무척 싫어하지만, 앤트로포비아 성향이라든가 비상한 두뇌 같은 게 닮기도 했기 때문에, 역시 운명의 라이벌들 답게 아주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마주 유지합니다. 단지 특이한 건 이들이 성인(중년) 남성이 아니라, 창조주 베르베르에 의해 영 애덜트 피메일으로 설정된 점입니다. 2권 p71에 다시 나오는 사피오섹슈얼이라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권 후반부에서 니콜에게는 새로운 남성 동반자가 생겼는데 그게 라이언이었습니다. 니콜 같은 여자애를 누가 남자로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도 둘이 나누는 티키타카를 보면 라이언 역시 만만한 녀석이 아닐 수 있겠다 싶죠. p32를 보면 니콜이 라이언에게 "한 개의 말로 두 기물을 동시에 공격하는" 포크 전술애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저도 폰이나 컴에서 싱글로 놀 때 상대(즉 프로그램)가 이 전술을 즐겨 구사하는 걸 겪었습니다. 그럼 아까워도 하나를 내 줘야죠. 책에도 나오듯 이 전술은 나이트와 함께 잘 시행되는데, 나이트가 대각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니콜의 약점이라면 1권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었지만 종종 분노가 그녀를 삼켜 버리고(p39), 뇌가 감정에 의해서만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p42에서 모니카가 호되게 그녀를 비판하길, 도대체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거죠). 아... 역시 1권 말미에서 이 라이언이(라고해서) 과연 니콜과 끝까지 갈 수 있겠나 싶긴 했는데... 베르베르 소설이 간혹 그러했듯 전혀 예기치 않던 대목에서 훅 치고 들어와서는 중요 줄기 하나를 툭 쳐 버린다는 게, 매번 겪으면서도 독자는 방심하다 충격을 받습니다. 체스의 하수가 게임 중 갑자기 체크메이트(p63)를 당하듯 말입니다. 와, 여기서 갑자기 이래버리면 나머지 이야기들이 제대로 굴러가긴 할까? 베르베르는 이미 입지가 다져진 작가인데도, 어떤 편안한(그리고 익숙한) 길로만 간다든가 하는 얕은 수작을 부리지 않고, 팬들에게 막 어필해야 하는 신인처럼 과감한 수를 두며, 그래서 우리는 그가 좋습니다(친한[親韓] 작가의 작품답게, p147에선 이순신이, p201에서는 반기문이 언급됩니다). p84를 봐도, 베르베르는 아까운 캐릭터들을 참 잘도 날립니다. 장기의 기물처럼(모니카의 표현입니다) 말입니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특히 나치 하에 수용소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은 임산부들이 낳은 아이들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비만 유전자가 활발히 작동한다는 사례가 보고되면서 더 주목받았습니다. 당대에 획득된 형질은 유전자단위에 새겨지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기에 18세기 학자 라마르크(p53)라든가 그의 입장을 계승한 이들은 많은 비웃음을 샀습니다. 그러나 저 후성유전학의 예에서 보듯, 특수한 경우에는 획득형질이 후손에까지 유전될 수 있다는 결론은 다시금 인류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참된 변화와 개혁이 출중한 개인의 노력에 달렸는가, 아니면 어떤 집단지성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가, 더 신중한 기질의 모니카 역시 자신들 둘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양 진영을 대변함(p57)을 알고 착잡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고문(torture)라는 게 역사가 꽤 오래되었고, 동양이나 서양이나 각각의 개성에 따라 기발하고 악랄한 방식을 발전시켰더랬습니다. 인간이란, 일단 상대를 타자화하고 나면 못할 짓이라는 게 없을 만큼 잔인한 동물이죠. 니콜을 함정에 빠뜨려 구금한 ooo 측이 사실 문명인임을 포기하고 어떤 몹쓸 짓을 저지를 만큼은 (소설 속에서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니콜은 그 특유의 기질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무너져 어떤 단계에까지 이를지 걱정이 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대견한 게, 가상의 대화 상대(p61)를 만든다든가 해서 불안을 극복하려는 노력입니다. 이 분야에서 단연 최고봉은 골드먼의 유머 소설 <프린세스 브라이드>에서 웨스틀리가 루겐 백작 앞에서 취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권에서 어린 모니카가 겪은 참사, 이 2권 p64에서 모니카가 잠시 낮잠을 자다 꿈 속에서 다시 만난 사고, 또 2권 p223, p243의 이슬람 성지 메카의 대형인명손실은 마치 2022년 서울의 이태원 압사 사건과도 닮았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니콜이 호주 대농장주의 딸로 세팅된 데에서, 딕 프랜시스의 고전 <For kicks(1965)>에서의 댄 로크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로크는 사상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보 당국을 위해 온갖 헌신을 하고도 결국 소모품 취급만 당합니다. 그에 비하면 레드 밀리어네어 루퍼트 오코너의 동기(p170)에는 뭔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딸이 기어이 KGB에까지 찾아가 특급 요원이 된다... 하긴 출신 성분을 떠나 이 여성은 그 비상한 두뇌 때문에, 뭔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수긍이 된다고 할지. 

p131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나오는데, 1980년대 아프간 반군 무자히딘의 반 소련 투쟁은 세계로부터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데 급급하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을 한껏 키워줘서, 정작 무자히딘의 주류도 아니었던 탈레반이 새로 부상하여 이후의 아프간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다시피했다는 점입니다. 베르베르는 여기서 마수드의 입을 빌려 미국의 실책을 맹비판하며 나중에는 빈라덴(p263)까지 거론하는데, 조금 오버가 아닌가 싶지만 여튼 결과론의 힘을 입어 말 자체는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베르베르뿐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다 아니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여자 두 명이,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터진 큼직큼직한 사건들의 배후에 알고보니 다 관여되었다... 좀 황당할 수 있어도, 심지어 체스에서 가장 쓸모있는 말은 퀸(상하좌우 대각선 모두로 이동 가능)이며 킹(한 칸 이동에 급급한)이 아니라는 누구(두 여자 중 한 명입니다)의 말은 소름끼치도록 정확합니다. 이제 노년에 달한 두 여인이, 십대 시절에 이어 두번째로 벌이는 체스 대국으로 소설이 마무리되는 건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평소대로, 역사와 문명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통찰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이어지는 이야기가 놀랍지만, 여태 시도 않던 두 명의 여성 이단아를 무대 중심으로 끌어올린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Two) girls can do anything?" 

*출판사에서 제공한 소설을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