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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대각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평점 :
사람이란 참으로 복잡한 동물입니다. 보통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쉬운 공감을 보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 더 심하게는 사이코패스다, 이런 식으로 단죄를 일삼곤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니콜과 모니카는 정반대입니다. 작은 동물을 가둔다든가, 생체 실험을 기조로 시도한다든가 하는 잔인한 방침을, 본인들과 지근거리에 있는 담임교사, 급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하는 걸 도저히 못견뎌합니다. 과연 니콜과 모니카는 반사회성 가득한 부적응자, 인간혐오자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동료들(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의 비인간성을 차마 용인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외 케이스일까요?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가 꼭 아니라, 누가 옳고 누가 한심한 야만인인지는 명약관화합니다. 다만 우리는 니콜이나 모니카 같은 이들을 두고 융통성이 없다며 핀잔을 주기는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편의를 위해 그 정도를 배려 못 하냐면서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니콜과 모니카는 아직 미성년자이기는 합니다.
니콜의 부친,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장주 루퍼트 오코너 씨(아일랜드 출신[p155, p178] 이민자들도 호주에 아주 많죠)는 아직 모든 게 혼란스러울 딸을 위해 일반적으로 타당한 사항을 차분하게, 지성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우리도 사회과, 혹은 국어과 교과서에서 집단(group)과 군집(gregariousness)의 차이에 대해 배웠습니다. 후자는 특히 라틴어에 기원을 두는데, p24에서 루퍼트 씨가 egregius의 개념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접두어 e가 out of의 뜻이므로 오히려 누구보다도 뛰어난, 예외적인, 이런 뜻이 되죠. 아무튼 집단지성의 (의외의) 중요성을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우리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들의 울음을 거론하는 대목에서는 토머스 해리스의 1989년 장편 <양들의 침묵>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p33에는 예의 그 위대한(?) 책, <상대적이며...>에서의 특정 항목이 일부 발췌되는데 저 "오시야"라는 게 우리나라로 치면 "푸시맨"이죠.
특히 모니카는 학급에서 1등을 할 만큼 머리가 우수합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감정적 어리석음을 잘 공략한 프리실라의 얕은 수에 밀려 결국 학급대표 선거에서 떨어집니다. 이 우화는 현대 민주주의의 맹점을 잘 고발합니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대중은 그들에게 교활하고 유해한 방식으로 아첨하는 정상배(政商輩)에 놀아나며, 베네수엘라의 예에서 보듯 결국 망국의 길로 치닫습니다. 물론 학교 성적이 우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뛰어난 지도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공동선이 무엇인지, 복잡다기한 세계 정세의 변화 속에 어디를 공동체 비전의 소재지로 삼아야할지에 대해 깊은 학식이 없다면 일차 자격 미달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고 목전의 이익 달성에나 골몰하는 모사꾼이 득세하는 나라라면 그냥 문을 닫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생각보다 쿨한데, p45에서 vox populi vox dei라는 라틴어 속담을 인용합니다.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란 뜻이죠.
아... 모니카는 이름부터가 왠지 순탄치 못한 생의 경로를 다분히 암시하는 팔자인가 봅니다... p60에 나오듯이 Monica의 mono-라는 형태소는 혼자, 단일한, 같은 뜻을 지니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니 말입니다... 라는 자탄은 다분히 과장이고 오류이기까지 합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지요. 모니카라는 이름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소녀들에게 붙여진 보편적인 이름입니까. 오히려 정신의 유니크함은, 집단의 건강성을 높이고 창의력을 증진하여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외(p61, p265)는 오히려 축복이며 선물이고, 그래서 예로부터 그 부모에게 선물과도 같은 아이(여자)에게 이 이름이 붙었던 것입니다. 오, puella egregia!(예외적인 소녀여!)
심리학자 보링이 지적한 아가씨-노파 그림이라든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그림 토끼-오리 같은 걸 보면, 단일한 형상이라고 해도 이를 보는 사람이 그 마음에 무엇을 두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책 1권의 표지를 보면, 하얀 낱빛을 한 사람의 옆선 실루엣이 보이기도 하고, 체스의 기물 중 퀸과 나이트(둘 다 검정으로 뽑혔네요)의 일부가 보이기도 합니다. 체스에서 둘의 공통점이라면, 대각선(에 가까운) 행보가 가능하다는 점이겠습니다. 조감, 조감... 인간이라는 개체는 너무도 시야가 좁아서, 눈 앞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터져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합니다. 니콜은 소설 저 앞에서 아빠 루퍼트가 암시한 대로, 사실은 사람이 양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양이 사람을 이용하듯(어디까지나, 루퍼트 씨가 그리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자신도 스노볼처럼 작은 수 여럿을 빌드업하여 세계 역사 자체를 바꿔 놓을 마음을 먹습니다(p67).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체스 대회는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영국 영토 지브롤터에서 열리며 그다음 위상이 북대서양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토너먼트입니다. 1960년대 이래 내내 그러했고, 북극 대권 항로의 요충지이기에 아이슬란드는 미소 냉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외진 무대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여기서 만나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던 것입니다.
루퍼트씨는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에 대해 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우리가 봤듯, 루퍼트씨는 특출한 개인 지성의 기여(p267)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개체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현실화하는 집단지성의 힘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1972년 대회에서 소련 측 스파스키는 사실 혼자 힘으로 싸운 게 아니라 관중석 등에 심어 놓은 온갖 스파이들의 힘을 빌려 이기려 들었다는 건데, 이를 반칙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동료들과 협력하여 승리를 얻으려는 미래지향적 인간형을 대표한다고 루퍼트씨는 찬양합니다. 참으로 독특한 태도입니다. 하긴 1982년 3월의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반드시 이기려고 회사 차원에서 파견한 관중석의 인력들이 쌍안경으로 상대 덕아웃과 포수의 싸인을 읽어내려 했었다는 썰도 있었습니다. 42년이 지난 이제는 피치컴이라는 게 도입되어 이런 생각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p112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 터집니다. 니콜은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다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낙담합니다. 반면 상대는 매력적인 외모도 외모지만 남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품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이런 고민에 몰두할 사춘기 소녀라고 하지만 어쩜 이렇게 잘못된 착각에 안타깝게도 빠져 있을까요! 더군다나 기품이란, 외형의 피처(feature)가 아닌 내면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니콜은 그 뜻밖의 변을 당하고도 오히려 침착합니다. 이유는 우리 독자들이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p113의 <살아있어>라는 노래는 존 트라볼타 주연 <토요일 밤의 열기>에 삽입된 "Stayin' alive"이겠습니다.
단체는 반드시 개인보다 우월한가? p131 이하에서 교수는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이행을, 마치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진화에까지 비유합니다. 하긴 아리스토텔레스(p241)도 사람은 본래 그런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한편 딸이 미혼모가 되었다는데도 오히려 할아버지 자격 취득에 더 감격(p151)하는 루퍼트 씨를 보면 확실히 예사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저 뒤 p225에 나오듯 사실 이 양반은 어느 유명한 단체(1998년 이후에는 더 이상 유명하지 않습니다만)에 뒷돈까지 대고 있었던 거죠. p273에는 "속이 빨간 억만장자"라는 말도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