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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노랑나비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4년 5월
평점 :
얼마 전(5월 중순)에 이시형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그 책에도 보면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삼촌이 지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바뀌었다 싶을 때 그간 쌓아온 설움을 한번에 다 쏟아내겠다는 듯 못된 짓을 해 대는 패악 분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이팽이라는 놈(p37)이 그렇습니다. 원래 인간 못된 것은 제놈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 이른바 은반위수의 패륜 짓거리를 하는 게 공통인데, 오갈데없는 것을 거두어 사람 대접을 해줬더니 벌인다는 짓이 저렇습니다. 어렸을 때 충명하고 남의 선망을 한몸에 받던 귀한 인생은, 저렇게 비천한 자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기도 하니 주의할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할머니도 지금은 몸이 아프셔서 요양보호사 이모(p43, 98)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대소변을 가리기 힘들어 방에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지금 고은이하고 똑닮은(p145) 소녀였습니다. 선예(김선예, 즉 고은이 할머니), 화자, 순덕이(옛날 분들이라서 이름이 다 저렇습니다) 등과 동네를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십니다. 그때는 다들 피부도 곱고 천진난만한 소녀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어린 시절, 젊고 잘생기고 총명했던 삼촌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걸 보고, 사람을 대체 어떻게 때리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냐며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우리들은 몸에 부드러운 곡선이 생겨 제법 처녀 티가 나고 있었다(p30)." 할머니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 왜 싸울까? 미움과 증오는 어디서 비롯하는걸까?" 어린 고은이의 질문(p76, p158)입니다. 고은이는 너무 어려서 한국전 당시 삼촌이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도 그저 들어서 알 뿐입니다. 다만 고은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뉴스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엄청난 양의 포탄이 도시에 떨어져 중요 시설들이 못쓰게 망가집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상대 쪽의 잘못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고은이를 불러다놓고 다시 할머니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습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야 쓸데없이 남을 질시하지 않고 심성이 곱게 자라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전쟁 배경은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일수 오빠는 LST가 미군이 본격적으로 인천상륙을 준비하기 위해 저렇게 기동 중이라고 전하고 아버지도 그 비슷하게 예측하시지만 사실은 그게 아님이 드러납니다. p110을 보면 미군이 구룡포로 물자와 인력을 철수하기 위해 이 함정을 운용했다고 나오는데, landing ships, tanks의 약자입니다. 채고은의 친구 은미는 공부 잘하는 친구, 잘생긴 친구 등 부러운 애들이 세상에는 많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 신경쓰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애들만도 못한 심성으로, 제 스스로도 무슨 소린줄 모를 미친 증오의 외침을 짐승처럼 떠들고 다니는 열등감에 쩐 불쌍한 인간도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외할머니가 수 놓은 것은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기도였다." 얼마나 가슴 뭉클해지는 말입니까. 세상에는 이처럼 남도 잘되고 나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선한 인생이 많지만, 얄팍한 이기심과 출세욕, 나면서부터 거짓을 즐기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불쌍한, 저주받은 인생도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에는 노랑나비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나비에는 죽은 자의 영혼들이 들어가서 저렇게 가냘픈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채고은이 쓴, 학교 제출용 보고서로 마무리되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쟁과, 70여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6.25를 서로 등치시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린 학생이 간절히 바라는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호국 영령이 산화해 간 6월을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