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전 시집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백석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지용도 납북, 월북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긴 시간 동안 판금되었지만 백석이야말로 그 아름답고 모던한 시 세계가 오로지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절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던 비운의 시인입니다. 출판, 표현과 그 향유의 자유를 막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태인지를 새삼 되씹게도 되며, 한편으로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니 북에서 기어이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시를 읽어 보면 대책없을만큼 천상 부르주아의 자유분방하고 탐미적인 시상이 그네를 뛰는데 이런 분이 애초에 프롤레타리아트 리얼리즘과 어떤 접점을 갖는다는 자체가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백석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티없이 맑고 천진한 귀공자의 상입니다. 앞서 리뷰한 정지용 시인은 냉철하고 날카로운 지성인의 모습인 점과 대비됩니다. 정지용이 백석보다 열 살 위이며 백석은 김일성과 동갑인 1912년생입니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듯 백석은 실제로도 러시아 여인들과 일정 접촉을 가졌으며, 비록 백여년 전이라고 하나 러시아의 영토가 저 먼 극동(즉 우리 동아시아)에까지 미쳤고 더군다나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상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아 적계와 백계가 곳곳에서 무장 충돌 중이었기 때문에 조선 인텔리 청년(더군다나 극장신)이 러시아 여성들을 만날 여지는 충분했습니다. 유독 그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던 것도 (러시아 문학 자체의 질적 우월성과는 별개로) 이런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나는 나의 녯한울로 땅으로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니(p145)" 그의 시 <北方에서>의 한 구절입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스타북스 시집 4권 세트에서는 시인들의 작품 발표 당시를 표기 기준으로 삼았기에 뭔가 모양새부터가 옛스럽고 그윽한 맛이 풍깁니다. 백석을 우리가 퇴폐적인 로맨티스트로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작품만 봐도 뭔가 자신의 먼 근원을 탐구하고 현재의 척박한 현실을 곱씹는 반항아의 영혼이 느껴집니다. 역시 시인의 시어(詩語)는 중의와 상징과 풍유 환유의 향연입니다. 

아무래도 백석은 정통 평안도 사람이다 보니 이 시 전집 전체에서 그 특유의 지방색이 느껴집니다. 평안도 일대의 지방색이라 하면 꼭 향토색만 뜻하는 게 아니라 관서 지방이 당시 독특하게 지닌 모던한 스타일도 포함하는 의미에서입니다. p100을 보면 <秋夜一景>에서 당등, 인간, 석박디 등의 독특한 고유어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인간"이란 단어도 아래 각주를 보면 평안도 일대에서 "식구"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해 줘서 약간 놀랐습니다. 위대한 문학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언어사전 구실을 한다는데 백석의 작품에서는 정말로 어떤 신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듯합니다. 남한의 ㅈ에 해당하는 음(치경파찰음)을 ㄷ 비슷하게 치경파열음으로 내는 평안 방언의 특색 때문에 長燈(장등)을 "당등"으로 읽는 것인데, 시인은 구태여 이 단어를 한자 아닌 한글로 적은 걸로 봐서 의도적으로 지방색을 표현한 듯합니다. 

p157에는 <흰 바람벽이 있어>가 소개됩니다. 왜 여기서는 "힌"이 아니라 "흰"인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책 겉표지에 실린 "힌당나귀"와 달리, 본문에서는 시 제목이나 시어에서도 "흰"이란 표기를 유지합니다. 이런 게 예외이고, 다른 작품에서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발표 당시의 표기가 관철된 게 대부분입니다. p158을 보면 "이즈막하야"라는 단어가 눈에 띄는데 책 전체를 통틀어 각주가 일련번호를 달았고 이 단어에는 각주 240번이 달렸으며 그 뜻은 "이즈음에 이르러"라고 합니다. 이 세트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 말미에는 외국 문학인 몇이 언급되는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동진(東晉) 대의 시인 도연명은 그렇다 쳐도 "프랑시쓰 쨈"이 누구인가 할 수 있습니다. Francis Jammes이며 프랑시스 잠이라고 읽으면 됩니다. 드 샤토브리앙이나 모리악처럼 가톨리시즘에 (후기에) 경도된 작가죠. 

작품집 말미에는 그가 북에서 창작했다고 알려진 몇 편의 시가 실렸는데 원래 백석은 한국전 이후 꽤 이른 나이에 숙청당하고 죽은 줄 오인되었지만 1996년에 비로소 사망했다고 최근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에서 (대체 백석 입장에서 그가 누구였을지 알기나 했을까 싶은) 어느 한국 대통령 이름이 갑자기 나와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 역시도 이념으로 갈라져 극렬 대립한 동족 상잔의 역사 그 흔적인 셈이라 마음이 착잡하면서도 한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편집이 깔끔하고 각주가 많이 달려 독자가 그 시대상이나 정확한 시어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