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전 시집 : 건축무한육면각체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이상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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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보다 두 살이 많았던 천재시인 이상은 그 빛나는 재능을 온전히 피우지 못한 채 27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문인입니다. 전공은 건축이었고 인접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미술, 회화에서도 기량을 드러냈습니다. 만약 그가 애초에 프랑스나 영국, 보헤미아(西 체코) 같은 데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아폴리네르나 구르몽, 혹은 입체파 브라크의 재능을 두루 갖춘 위인으로 그를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p44에는 그의 작품 <Le urine>이 실렸습니다. 과연 그의 시답게 난해하고 현학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뭔가 친근하게 말을 거는 느낌이 나 신기합니다. 아예 로마자를 쓴 단어는 그렇지 않지만, 한글로 쓰인 외래어, 외국어에는 방점이 찍혔습니다. 우수(憂愁)의 보조관념으로 사용된 사전(辭典)은 그 철자가 dictionaire인데 이건 아마 시인이 살짝 착각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 딕쇼네르는 n이 geminate되기 때문입니다. 수탉도 순사(巡査)가 오기 전에 고개를 수그린 채 미미하게 울어야 하는 암울한 밤, 도어에 manstruation을 휴업 핑계로 써붙여 놓은 대담한 마담, 사보타지를 행하는(왜일까요?) 태양 등 앞에서 무기력하게 퇴폐적으로 여송연을 꼬나문 시인의 남루한 행색이 절로 떠오르는 시입니다. 

p99에 실린 <No.2 열하약도>를 보면 1931년의 풍운을 적적하게 말하는 탱크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구태여 9.18 유조구(유조호) 사건을 떠올릴 것 없이, 그냥 중단된 건설 현장의 물탱크 같은 걸 연상해도 되겠습니다. 그는 누구못지 않게 공사판을 많이 떠돌아다녔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십 년 만에 재분출한 온천... 이 시의 배경으로는 더 이상 객석이 차지 않고 무대도 휑한 어느 극장이 적당할 듯합니다. 早辰(조신)은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칠십이면 그때 기준으로 천수에 가까웠겠는데 이상은 고작 자신의 스물넷의 나이(p127)를 갖고도 뻔뻔하게 살아왔다며 부끄러움을 표현합니다. 그보다 일곱 살이 어렸던 윤동주 시인과도 비슷한 정서, 주제입니다. p161에서는 "죄를 내어버리고 싶다. 죄를 내다던지고 싶다"고 합니다.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를 삽입하였다"라는 구절에서 어떤 비장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이런 표현들이 그리 호들갑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독자에게 애수를 안깁니다. 차압은 압류의 옛 용어입니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한참 후에도 문학에서는 이 차압이라는 용어가 참 널리 쓰인 듯합니다. 

요즘은 이상하게 데드마스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p94의 <自傷>에서 시인은 "데스마스크(death mask)라며 정확한 용어를 댑니다. "식어들어가는 마음의 도해." 백지에 깔린 한 줄기 철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허위를 담았다는 전보에는 명조(明朝. 내일아침) 도착이라는 네 글자가 담겼다고 합니다. 허위 메시지를 날린 발신자 역시 식언의 자책이 왜 강하게 마음을 치지 않겠습니까만 여유작작한 시인의 마음은 천성이 그러한 듯합니다. 出奔은 도주와 같은 뜻입니다. 

요조하다던 정조가 성을 낸다, 칠면조처럼 쩔쩔맨다... 과연 이런 부류의 여성들 심리를 훤히 꿰뚫은 시인다운 날카롭고 해학적인 묘사입니다(p87. <白畵>). 우리는 세상에서 얼마짜리로 통하는 인생들일까요. 그 값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저런 부류의 여성들한테 가서 정확하게 감정을 받아 볼 일입니다. 단, 어떤 대답을 들어도 이 시인처럼 타격감 제로라며 너스레를 떨 만한 주제는 되어야 합니다. 

장난감 신부의 살결에서 우유 냄새가 난다... 그렇다고 말을 건네니 이 신부 역시 성을 내었답니다. 그 연유는 목장까지 산보갔다와서라며 답답한 시인을 나무랍니다. 여기서 다소 섬뜩한 고백이 들리는데, 시인이 영양분을, 영양분이라는 것을 입이 아니라 코로만 섭취해서 수척해간다는 말이 있어서입니다. 그러고보니 코로 맡았다는 냄새 역시도 일종의 환각취이지 싶습니다. 시인은 이 장난감 신부가 자꾸 자신을 찌른다고 여기는데 이 역시도 그의 일방적인 perception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모른체하는데 건강도 나빠지고 신부에 대해 면도 안 서는 곤궁한 신랑의 불가피한 처세이겠네요. 

예쁜 장정 안에 천재시인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담은, 소장 가치 만점의 에디션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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