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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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를 접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크게 부러운 점 중 하나는, 프로야구와 미스터리 장르물 분야가 수요, 공급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크게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오타니 쇼헤이, 즉 대곡상평 같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세계적 스타가 배출되어 저렇게 활약하고 있으며, 직접 비교할 건 아니지만 (과거 요코미조 세이시, 또 훨씬 이전 에도가와 란포 등의 뒤를 이어) 이 히가시가와 도쿠야 같은 차세대 작가(물론 현재 예순을 바라보는 분이지만)가 계속 특정 장르물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해당 문화를 즐기는 팬과 독자에게 너무도 행복한 체험이 자국어, 자국 감성 상태로 가능하다는 게 부럽습니다. 

1995년 초에 일본에서는 효고 현 대진재라고 나중에 이름붙여진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2011년 동북 대지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저때의 피해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막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해 봄에는 옴진리교라 자칭하는 사교(邪敎) 집단이 전철 안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등 종전의 안정된 일본 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사건이 터져 확실히 세기말은 세기말인가 보다 같은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1998년에 론칭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오프닝 송에도 가사 중에 지금 들으면 뜬금없는 세기말 타령이 나오는 게 다 이 때문입니다. 

이 작품 중 서두에 세 젊은이가 세토나이카이(이 한국어판에서는 내내 "세토내해"라고 번역됩니다)에서 뜻밖의 변을 당하는 에피소드에서 지진, 사린 가스 운운하는 게 다 저런 시대상을 반영해서입니다. 캐릭터들의 저런 언급들이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어도, 이 작가 스타일이 원래 다변(多辯)에 코믹에 self-referential하기 때문에 별 위화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재미를 더하는 장치들입니다. 

육지와 고립된 섬만큼 지방색이 강한 지역은 없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 획일적인 것보다는 낯선 것을 구경하고 싶어하며 그러기에 전라도 서남해안, 남해안 등의 신기하고 다채로운 섬 풍경을 예로부터 그토록 즐겨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 오카야마 변두리의 어떤 섬은 그런 맥락이 아니라 다른 상황, 소유 관계 때문에 몇 사람, 좀 특별한 사람들, 돈이 많아서 특별하건, 돈이 많아서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관계라서 특별하건, 그냥 성격이나 생긴 게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특별하건,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특별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인공이라 할 탐정 고바야카와(여러 이유로 한국인들도 잘 아는 성씨입니다) 다카오, 변호사 야노 사야카 등도 제 생각에는 머리가 좋다, 똑똑하다, 영리하다(직업상의 선입견)는 느낌보다, 뭔가 성격적으로 외모상으로 좀 특이한 사람들처럼 다가왔습니다. 

작품 중에도 언급이 있습니다만 이 두 남녀 주인공은 2대 직종인들, 즉 선대의 가업을 물려받아 일하는 사람들입니다(주치의도 포함). 물론 (소설을 읽다 보면, 또 이미 같은 세계관의 전작들을 읽었으면 알 수 있지만) 자신의 능력도 갖춘 사람들입니다. 선대의 경험과 지혜도 전수받은 데다, 본인 고유의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얼마나 부럽고, 또 사회적으로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무 자질도 자격도 없이 대접만 받으려 드는 식충이들하고는 구별되는 게 당연하죠. 이 소설에서 다카오가 기어이 찾아내 이리로 데리고 온 쓰루오카 가즈야(신호등 패션)는 과연 어떤 타입의 인간일까요? 아 참 그리고, 다카오와 사야카가 과연 그렇게 촉망받아야 할 만큼 뛰어난 자질의 2세들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 나름의 이유로 매력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특히 사야카의 경우) 꼬마 미사키가 그렇게 졸졸 따르는 거겠죠. 

알게모르게 관련된 사람들이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하나둘 섬으로 몰려든다, 혹은 배경이 꼭 섬이 아니라고 해도 공증인, 유언집행인의 주도로 한 자리에 모여 마침내 개봉되는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장면은 장르팬들에게 무척 익숙하지만 또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유언장 파트 2를 개봉할 때, "이 부분이 발표된다는 건 곧 (최초 수임인인) 야노 고조 변호사가..... 라는 뜻이겠지?"라며 유언자가 짐짓 묻는 부분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딸인 사야카가 "너무 뻔하게 읽힌다(predictable)"며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호들갑입니다. 아니, 아빠나 본인이나 이 단계에서는 장르 공식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뻔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다카오하고 괜히 티격대는 본인은 독자한테 안 읽히는 줄 아는 걸까요? 

"범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는 뜻이지.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책 뒤표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과연 이 문장은 우리한테 무슨 복선을 던지는 걸까요, 아님 (여태 그랬듯이) 히가시가와 씨 특유의 너스레일 뿐일까요? 소설 중에는 사이다이지 저택의 구조도를 포함, 독자에게 상세한 힌트를 주어 공정한 게임이 되게 최대한 노력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섣불리 짐작하거나 결말이 궁금하여 괜히 과속하지 말고 한번 이겨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퍼즐 풀이에 임하길 권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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