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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기업은 어떻게 위기에 더 성장하는가 - 결국 이기는 기업의 경영 원칙
리즈 호프먼 지음, 박준형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2월
평점 :
개인에게도 기업에도 위기란 언제나 닥칩니다. 위기 없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만 넘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대개는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극복하면 그저 살아남은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종전과는 다른 탁월한 단계로 거듭나곤 합니다. 우리가 최고의 기업으로 아는 구글이나 애플, MS나 코카콜라 등도 평탄하게 내내 최고였던 게 아니라 순식간에 이류, 나아가 폐업지경까지 굴러떨어질 뻔한 적이 있었으며, 그런 위기를 뛰어넘고 나서 현재의 최고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기업들이 위기, 특히 코로나 팬데믹 같은 전례 없던 위기를 넘긴 방법에 대해 생생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고찰합니다.
크리스토퍼 나세타는 세계 최고의 호텔 체인인 힐튼의 CEO이며 올해 60세입니다. 세련되고 다정해 보이는 외모는 과연 힐튼이 지향하는 비전에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는 콧대 높은 고급 서비스를, 호주머니 두둑한 고객들만 보고 제공하는 과거의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갈망하며 가성비와 합리적 소비를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수요를 정확히 타게팅했습니다. 호텔 산업은 거시경제의 사이클에 제법 큰 영향을 받는 편인데, 21세기 초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 등으로 힐튼은 제법 큰 위기를 맞았고 이때 부임한 게 나세타입니다. 책에서는 "힐튼이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위기가 닥치기 몇 개월 전에" 그가 취임했다며 이 승부 근성 강한 경영인이 이룬 성과를 함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패트릭 고먼은 호주 태생이며 굴지의 금융기관인 모건 스탠리의 회장입니다. 나세타 회장보다 몇 살 위며 아직 경영인으로서 한창 활동할 나이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예컨대 사우디의 실권자인 빌 살만 같은 이와 만나 유망한 사업에 대해 마치 일상사처럼 상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듯 지구촌에는 간헐적으로 전염병이 돌며 21세기 초 사스(SARS), 2014년 메르스, 그리고 2020년 코비드19 같은 게 그 예입니다. 역시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대로, 앞의 두 병과 달리 코비드19는 전세계 경제를 올스톱시켰습니다. 고먼은 이 질병이 여태 겪었던 몇 번의 경우와 완전히 다른 재앙이라는 점을 중동에서부터 이른 시기에 이미 직감했습니다. 팬데믹은 모든 경제 단위에 큰 위기를 던진다는 건 우리도 지난 코로나 시기에 얼마나 많은 자영업자들이 폐업했는지를 보고 잘 압니다. 델타의 CEO인 에드 바스티안 역시도 자신의 사업(항공)에 이 위기가 어떤 의미일지 바로 보고 판단했습니다. 위기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한 두 사람은 위기가 종료한 후 더 큰 승자로 우뚝 섰습니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요즘도 케이블 TV에서 종종 방영되는 게 영화 <빅 쇼트>입니다. 모두가 한 방향만을 바라볼 때 과감하게도 반대편을 보고 베팅하여 남들이 쪽박을 찰 때 홀로 큰 돈을 번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p159를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고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내실을 다진 미 8대 은행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우리들이 기억하는 대로 당시에는 부도덕한 금융인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절정에 달해 "월가를 점령하라!" 같은 시위가 빈발하던 때입니다. 이게 입장을 바꿔 경영자 쪽에서는 당장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한국도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숱한 금융기관, 대기업들이 쓰러졌으며 흡수합병과 구조조정을 잘 치러낸 곳들은 지금 엄청나게 체질이 강화되어 승승장구합니다.
스티브 므누신은 영화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제작자로 이런저런 화제작에 이름을 올린 그를 알 만합니다. 이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코비드19 유행기에 타 대륙으로의 항공을 일절 중단시킬지를 놓고 관계 장관으로서 책임 있는 의견을 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트럼프는 자신이 임명한 장관,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과 싸우는 게 주특기였으며 그래서 장관 해임이 타 행정부에서보다 빈발했습니다. 므누신은 4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한 유일한 내각 멤버였을 만큼 트럼프와 코드가 잘 맞았습니다.
더그 파커는 앞의 에드 바스티안처럼 항공사(US Airways)의 CEO이며 정부 당국에서 어떤 조치를 내릴지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휘청일 수 있음을 알고 이 전례 없던 위기를 어떻게 잘 다룰지를 놓고 노심초사 중이었습니다. 항공사뿐 아니라 에어비엔비 같은 숙박업체(모바일 혁명으로 급부상한)도 팬데믹 때문에 큰일이 난 판이었습니다. 우리도 저무렵 대한항공, 진에어, 하나투어 같은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기 때문에 이 책에서 묘사하는 긴박한 상황에 공감이 잘 됩니다. 한순간 삐끗하면 그 즉시 폐업해야 할 지뢰밭 같은 여정... 한국인들도 저때 한경이나 매경, mtn 등 경제채널을 틀어놓고 뭐 좋은 정보 없나 귀를 쫑긋할 때였는데 더그 파커도 CNBC를 틀고 순간순간 나오는 속보에 가슴을 졸였다고 하는군요. 물론 개미투자자와 거대기업의 CEO가 느끼는 중압감은 차원이 다르겠지만... p260 같은 데를 보면 개별 기업을 넘어 거의 업종 자체가 붕괴할 위기인데 이런 걸 경영자가 어떻게 견디나 싶기만 합니다.
골드만삭스의 본사는 건물 아래 허드슨강을 굽어본다고 이 책에 나옵니다. 일이 잘 풀리면 그보다 더 근사한 뷰와 낭만이 없겠으나, 만약 성과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기라도 하면 속된 말로 "한강마려운" 지경까지 가기도 하며 우리나라 증권사 상당수가 (한강이 보이는) 여의도에 본점을 두는 것도 우연만은 아닙니다. 팬데믹 때문에 대불황이 닥치면 또한 조업 일정 등으로 타격을 받는 게 자동차 업계인데,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3대 메이커라고 하면 GM, 포드, 크라이슬러이며 한 세기 전과 차이가 있다면 크라이슬러가 이탈리아 피아트에게 넘어가 이름이 살짝 바뀐 정도입니다. 3사 CEO가 만나 노동정책을 논의하는 자체가 반독점법 위반이 될 수 있다고 지적이 나왔다는 대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긴 한국도 공정위가 과징금 때릴 때 기업 실무자들이 언제 어디서 만났다는 사실을 갖고 담합 판정의 기초로 삼긴 합니다.
기업은, 특히 대기업은 따로 신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고정비용으로 나가는 지출이 무척 많습니다. 이렇게 거시경제 전반에 위기가 닥치면 운전자금 조달이 경색되며 CEO들은 돈을 대기 위해 곡예를 벌여야 합니다. p273을 보면 연준이 기준금리를 제로로 내렸다는 말이 나오는데 저때 저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제롬 파월의 입만 바라보며 며칠 전처럼 가슴을 졸여야 합니다만 팬데믹 때 받아먹은 것도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책 15장부터는 파커와 므누신이 벌이는 외줄타기 쇼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당시 뉴욕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p323)는 그 부친이 마리오 쿠오모이며 이분도 뉴욕 주지사를 지냈고 12년에 걸친 공화당 장기집권을 끝낼 기대주였습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빌 클린턴의 자리를 이 사람이 대신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 내력인지 평소에 잘하다가 결정적일 때 주춤거렸고 대권과 거리가 멀어지는 게 부자가 똑같습니다. 더그 파커는 공화당 민주당 가리지 않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민주당 주지사, 또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p352)와 컨택하는 등 동분서주합니다. 미국 경제를 들었다놨다 하는 거물들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배경에서 이렇게 한 무대에 등장하여 열연(?)하는 모습이 너무도 제미있었으며, 주요 인물들과 사건을 따로 강조한 편집도 무척 센스 있어서 독서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실은 이처럼,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를 받아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