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열림원 세계문학 4
헤르만 헤세 지음, 김길웅 옮김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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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힌두이즘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담아 창작했던 고전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단일 정체성을 가진 대각성인이 한 분 있었는데, 이 소설 속에서는 먼저 깨달아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고타마라는 인물이 있고, 고귀한 태생의 젊은 구도자인 주인공 싯다르타가 따로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싯다르타는 살짝 싱클레어를 닮았고 고타마가 데미안 포지션이기는 하나 훨씬 정서가 안정되었고(ㅎㅎ) 보편적 도덕성을 지향하는 개성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배경도 인도이며 분위기가 심오하고 신비롭기는 하나 이 장편에서 표현된 철학이 과연 불교와 깊은 관계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그저 헤르만 헤세 고유의 유니버스로 파악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적 싯다르타가 구도의 길을 걸을 때에도 온갖 사악한 영들이 끼어들어 집요하게 그 득도를 방해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p65에 나오듯 마라가 빚어내는 마야의 베일은 그의 눈을 어지럽히지만, 싯다르타가 어떤 필터를 통하지 않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볼 때 온 누리는 색(色)으로 마법을 부립니다. 그 색은 물론 구도(求道)와 무관하게 비천한 감각과 욕망을 따를 뿐인 평범한 인간의 눈에도 그리 보이지만, 이 시점의 싯다르타 눈에 보이는 의미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이 형상은 대체, 왜 다른 모습이지 않고 그 모습 그 색이라야만 하는가, 이런 심각한 의문과 함께 바라본 형상은, 이제 싯다르타를 전혀 다른 세계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색이 비로소 공(空)임을 그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공(空)인지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p86에 나오는 카말라와 싯다르타의 만남 장면은 마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서 주인공 블라디미르가 지나이다 부인을 만나는 대목과도 닮았습니다. 작품 속에서의 기능은 상당히 다르지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에바 부인의 등장 씬도 연상되는 부분이 있죠. 왜 청년은 헤세의 세계에서 이처럼 어떤 연상의 여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꼭 받고 특정 의례를 거쳐야만 하는 걸까요? 사실 카말라가 싯다르타에게 좁은 의미의 색, 즉 색정(色情)을 마스터해 주는 대목은 이제 제가 나이 들어 읽으니 그리 편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해서 싯다르타는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떠나보내는데... 어쩌면 카말라 부인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점잖은 분이 아니라 일종의 고급창녀(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라든가) 혹은 한국 텐프로 대마담 같은 사람이었다는 거죠(p168). 다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 시점의 싯다르타에겐 그렇게 아득한 스승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왔던 친구 고빈다가 p140에 다시 나옵니다. 이제는 제법 의젓한 스님 티가 나는데, 그래도 싯다르타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만 고빈다는 싯다르타, 이제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못 알아보죠. 그도그럴것이 이제 싯다르타는 누가 봐도 위대한 스승이지 자신과 철없던 시절 함께 발가벗고 뛰놀던 그 소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성공해서 외모 관리가 잘 되어 여전히 젊어 보이는 동창이, 그간 너무 고생하여 찌들고 상한 동창을 못 알아보곤 하는 풍속과 정반대이긴 합니다만. 

역사적 싯다르타에게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싯다르타도 저 창녀 카말라에게서 본 아들이 있고, 이제 그 아들이 그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합니다. 아들이 개구쟁이라서가 아니라(뭐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그 혈육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사랑이 부처님으로서 도달한 그의 평정심에 마지막 파문을 일으킨 셈입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 마지막 고비도 기어이 극복합니다. p208에서 이제 고승이 된 고빈다는 다시 싯다르타를 만나지만 또다시 그를 못 알아봅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초월자가 되었기에, 누가 그를 만나든 간에 그는 팔색의 형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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