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그네 2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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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나?" "네, 민우는 귀공자처럼 자란 아이였고 공부도 잘했습니다.(p112)" 그러나 현태가 찾은 민우의 이모는 매우 냉랭하게 대합니다. 세상의 염량세태가 다 이런 법이므로 너무 서러워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을 넘었다 싶으면 반드시 응징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모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좀 뒤 p123에 나옵니다. 그 이모는 기지촌 출신으로, 아주 힘든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말하는 뽄새에서도 무식함이 배어나죠. 읽으면서 그 배경을 알고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이 대목은 사실 약간 억지처럼도 느껴졌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이 삽입되는 건 소설의 대중적 매력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긴 했겠지만 말입니다. 

여튼 이 장편 소설은 독자들이 지루해할 틈 없이 페이지가 잘 넘어갑니다. 두 권 분량의 긴 이야기지만 젊은 남녀 주인공 그 비련의 사연을 정석적으로 풀어나가기에, 발표된지 세월이 이렇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때로는 마음이 아파지면서 독자가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1권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최인호씨는 그 시대의 풍속을 충분히 잘 녹여내는 분이라서, 그가 1970년대에 엄청나게 생산해 낸 작품들과는 이 작품이 또 분위기가 달라서 1980년대의 자식임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소 밝아졌으면서도 여전한 애상이 깃들어서 최인호스러움을 잃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최인호씨가 쓴 예전의 완전한 통속물도 책프 참여 차 읽어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에로티시즘을 얼마나 즐겨 구사했는지 잘 알지만, 이 작품은 마치 황순원 <소나기>의 20대 장편버전처럼 담백하고 청순합니다. 

한때 그렇게나 고결하게 성장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아이였으나 이제는 가장 처참한 지경까지 타락해버린 민우, 우리의 피리부는 소년은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지... 선하고 지혜로웠던 주인공이 이처럼 몰락하는 것도 최인호 작품 공식 중 하나입니다. 2권 p170에서 민우의 근황을 전하는 현태의 말을 듣다 보면 차라리 귀를 막고 싶습니다. 민우는 그새 기지촌에서 다른 여성 하나를 만나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유전자가 어디 안 갔는지 잘생긴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요소가 사연의 비극성을 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처지일수록 그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분별한 성관계에 빠져들 수 있는데(될대로 되라 심리) 남자건 여자건 이게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아파집니다. 

한때 피리부는 소년이었던 그는 이제 고기잡는(p212) 사내가 되었습니다. 현태는 민우에게 다혜 씨의 근황을 알려 주고 그녀에게 졸업을 축하해 주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민우는 자기가 한 짓 때문에 다혜를 볼 면목도 없고 이처럼이나 자신이 망가진 모습을 보여 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다혈질의 현태(p225)는 언제나 민우-다혜 커플의 속내를 가장 정확하게 꿰뚫은 관찰자이자 행동가였고, 일부러 민우가 자신을 망가뜨리는 중임을 다혜에게 (불필요하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행여 민우를 자신으로부터 누가 빼앗아갈까 전전긍긍하는 불쌍한 은영이(p230)... 이 소설에서 제일 불쌍한 인물이 바로 은영이죠.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피리 부는 소년. 과거는 추억일 뿐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네.(p262)" 현태의 말이 맞으며, 이제 민우는 자신의 현실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p285를 보면 여전히 현실에 부적응 상태를 드러내지만 은영이와의 궁합은 무척 좋은 듯합니다. 은영도 지독한 무능자인 민우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그나저나, 소설의 결말은 대단히 비극적이고 악인인 노파는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며 기어이 추가 악행을 저지릅니다. 제가 소설에서 가장 몸서리쳐지는 게 저런 썩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듯한 노파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삶은중단되었지만 누군가들의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집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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