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그네 1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 고 최인호씨는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이었습니다.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이끌어낸 분이었다고 하고, 무엇보다 엄청난 다작(多作)을 한 작가였습니다. 스스로도 어느 인터뷰에 나와서 "나는 괴물이었다"고 회고했었는데, 창작 영감의 원천이 마르지 않고 통속물이든 뭐든 끊임없이 지어온 그 엄청난 활력에 대해 평단과 대중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이 <겨울 나그네>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당대 청춘 스타였던 강석우씨 등이 주연으로 기용되어 젊은이들이 많이 관람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이 책 띠지에도 나오듯 지금 뮤지컬로도 상연 중인데, 이미 1990년대 후반에 박칼린 감독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뮤지컬에 대한 국내 인식이 대단히 미진할 때인데 역시 박칼린(이분도 그때는 무명)씨였다 싶습니다. 원작이 워낙 좋으니까, 인프라가 부실해도 히트작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최인호씨의 소설은 장면 묘사가 영화처럼 생생하면서도 독자한테 쉽게쉽게 넘어갑니다. 작가가 천재이기 때문에 본인 눈 앞에 (가만 있어도) 그림이 영상이 절로 펼쳐지므로 큰 수고를 않아도 이렇게 글이 쓰이는 것입니다. 구성이나 날카로운 주제의식 부각은 이문열이 나을 수 있지만 이런 생생한 스토리텔링 면에서는 최인호씨가 훨씬 뛰어납니다. 이 1권 p114만 해도, 민우, 운전사(당시 표현을 따릅니다), 다혜 등이 빚는 장면을 보면 영화를 안 봐도 독자 눈 앞에 영화 한 편이 상영됩니다. 유머러스하게 "호텔 보이처럼" 민우가 다혜한테 허리를 굽히는 매너를 보십시오. 경쾌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선한 마음이 가득한 주인공의 개성이 잘 드러납니다. 참고로 이 시절의 호텔 보이들은 사람 봐 가면서 차별 엄청 했습니다. 지금은? 예컨대 반포 JW 매OO 같은 곳은 직원들이 엄청 친절합니다. 이 대목에선, 민우가 쾅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는 장면, 다혜가 민우 옆얼굴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장면 등이 유명하죠.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p142)." 이 작품 속에는 부모 세대가 전횡하듯 정한 룰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사회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젊은이들도 그 호흡에 맞춰 살아야 하는데 기성세대들의 훈육은 그 폭발할 듯한 유기체의 약동을 질식시키려 듭니다. 젊은이들이 반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혜는 아무 부족할 것 없이 자랐고 그 부모님들도 딸에게 너무 잘해 주는 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영혼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끊임없이 반항합니다. 본래 젊은 세대는 이처럼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반항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존재입니다. 프랑스의 68세대를 떠올려 보십시오. 

한편 민우는 아버지가 그 끔찍한 사고를 겪고 식물인간처럼 누운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만 의연히 대처합니다. 역시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친과 잘 통하는 착한 아들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민우는 아버지에게 애써 뭘 말하려 들지 말라며, 나는 눈빛만으로도 아버지가 뭘 뜻하는지 안다며 안심시키고 그 심기까지를 간호하려 듭니다. 이렇게 애가 마음이 착하니까 얼굴에도 그 심성이 반영되어 잘생겨지는 겁니다. 싼티나는 색기 같은 것과는 유가 다르죠. 아, 그러나 형인 민섭이는... 

"한형국, 일어나라, 나와 담판하자. 너한테만 안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 독자들이야 민우한테 감정이입하여 저 비정한 채권자를 욕할 수 있지만 이 사람한테도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대체 이 채권자들이 무슨 죄로 그 손실을 감당해야 합니까. 잘못은 한민섭이란 악당이 저지르고 그 죄책은 부친, 남은 아들, 채권자가 뒤집어쓰는 건데 이때만 해도 가족이라면 연대책임을 져야만 하는(법적으로야 아니지만) 시대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민우는 그 별명이 피리부는소년이었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영화가 워낙 큰 히트를 쳐서 1980년대 당시 여대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와서는 강석우씨(지금은 노인인데)가 형상화한 피리 부는 소년의 이미지 때문에 설레서 잠을 못 이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1권 p296에서 피리부는 소년은 드디어 아버지에 대한 비보(悲報)를 듣습니다. 이 여린 마음을 지닌 소년(청년이긴 합니다만)은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