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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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p21의 역주에도 나오듯 이 소설엔 사실과 허구가 교묘히 뒤섞여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세기말에 러시아인으로 체스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게리 카스파로프가 IBM 社가 개발한 딥블루와 대국하여 큰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마치 2015년의 알파고 v. 이세돌처럼). 또 시드니 셸던의 아주 오래전 소설 <내일이 오면>에도 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치명적인 미녀 주인공 트레이시가 호화 유람선에서 체스 두 고수를 꺾는 장면도 (이 작에서 나타샤 아네르센의 등장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p14에는 카메라를 눈처럼 갖추고 그것을 통해 "보는" 컴퓨터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컴퓨터에게 "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에게 보는 건, 그저 망막 등을 통해 시각 정보를 지각하는 걸 넘어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개입하여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작용의 일부까지 포함합니다. 아마도 컴퓨터에게는 이게 상당히 다른 의미일 듯한데, 21세기의 1/4이 경과해가는 지금까지도 이 해명은 그리 명쾌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p26의 "사랑에 치여 죽은"은 프랑스어 원어를 제가 모르긴 해도 혹 영어라면 lovestruck (and dead) 정도일 듯합니다. 저 뒤 p77에 엔도르핀 과다 분비와 이 "사랑에 치여 죽은 상태" 사이의 관계가 설명됩니다. 

닥터 사뮈엘 핀처는 컴퓨터를 이긴 후 의기양양하게 "사람에게는, 컴퓨터에게는 있을 수 없는 동기라는 게 있다"며 도도히 지론을 설파합니다(p34, p52, p60, p228에 "동기"에 대한 재미있는 썰이 펼쳐지는데, 이 "동기"는 소설 <뇌> 전체에 걸쳐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핀처 박사 스스로도 말하듯 인간에게 물론 약점도 있습니다. 분노, 당황, 절망 등 감정에 공연히 휩쓸려 대세를 스스로 망치는 경향입니다. 또,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서 위험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인간(물론 특별한 소수에 한하지만)의 미덕을 칭송한 구절도 그만의 통찰이 돋보입니다(훨씬 전에 야마오카 소하치도 비슷한 소릴 한 적 있지만). 아무튼 이 대목은 이십 여년이 지난 후에 읽어도 그리 트렌드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 베르베르 특유의 안목과 발랄함이 잘 표현된 멋진 서술입니다. 

p27에서는 역자 이세욱씨가 풍부한 지식을 통해 왜 이 캐릭터의 이름이 카첸버그라 붙었는지에 대해 추론하고 있으며 또 이는 독자로서 충분히 수긍할 만한 주장입니다(카첸버그는, 스필버그, 게펜 등과 함께 1990년대 말에 드림웍스를 만들었던 제작자죠). p88의 역주 24번, 대굿과의 한 물고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세욱씨의 박학다식함이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순전히 저 개인적으로, p26의 "탁구공 만한 물방울"이란 구절에서 가스통 르루의 피조물인 룰타비유가 생각나기도 했고, 역시 같은 프랑스 작가였던 르블랑의 이지도르 보트를레도 떠올랐습니다(둘 다 소년 탐정). 물론 p29에 나오듯이 이 이지도르 카첸버그의 외모는 소년의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p36의 테나르디에 부장(뒤 p203에서도 언급되는 여성)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그 악역들(부부)과 이름이 같네요. p229에서 하필이면 제롬의 성씨가 베르주라크라서 17세기의 그 프랑스 문학가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p82를 보면 조르다노 교수가 핀처의 시신에서 뇌만을 떼어내 보관하는 장면이 있는데 물론 부도덕합니다. 생전에 핀처한테 신세진 바도 있다면서 왜 이런 망자에 대한 무례를 범하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JFK도 암살 직후 총탄에 손상된 뇌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고 하나 이 소설에 나온 것과는 아마도 다른 동기에서였겠죠(p232에 필립 케네디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p89에서 뤼크레스 넴로드에게 이지도르 카첸버그가 치는 장난은, 우리 한국에서라면 "히말라야라고 다섯 번 말해 봐"라 한 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답하게 하는 그것과 원리가 같습니다. 익숙함 때문에, 뻔히 알면서도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오답이 나오죠. 저 뒤 p172에도 비슷한 게 나옵니다(보크, 포크). 

최면에 걸린 뤼크레스처럼, 과연 인간은 자신의 태아였을 때 웅크리고 엄마 뱃속에 있던 기억(p97)을 무의식 레벨에서라도 갖고 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태아 비슷한 자세는 후천적으로 학습한 내용을 재현한 것이니 이 사람이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증명하는 셈입니다. 아무튼 이런 우연한 해프닝에서 기발한 착상을 통해, 사뮈엘이 oo o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실낱 같은)을 찾아내는 걸 보면 이지도르가 천재 맞는 듯합니다(그 결론이 맞건 틀리건 간에). p84에서 사지가 마비된 채 오로지 의식만 남아 사투를 벌이는 장루이 마르탱의 상황에선 레이먼즈 존스의 장편 SF <The Cybernetic Brains>가 생각나기도 하고, 사지가 마비되어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이가 눈짓으로만 소통을 하는 이야기로는 코널 울리치의 단편 스릴러 <Eyes that watch you>가 있습니다. 

이 장편에서 또하나의 키워드는 "변신"이겠는데 매우 성실한 직원이자 가장이었던 장루이 마르탱이 교통사고 후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리스 상태에서 아무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으며 가족에게도 서서히 외면 받고 간호사에게 지독한 학대를 받다가, 학문을 빨아들이는 고성능 공부 기계로 탈바꿈하여 마침내 머리에 전극을 심고 어떤 경지(감정의 영토를 정복. p263)에 이르는가 하면, 평범한 기자 뤼크레스가 팜파탈(p238)로 변신하는 대목 등이 그 예입니다. p285에는 드디어 움베르토의 입에서 "최후 비밀"이란 말이 나오는데 사실 이 한국어판만 제목이 "뇌"일 뿐 원서의 제목은 (책 표지에도 나오듯) "최후 비밀(L'ULTIME SECRET)"이죠. p287에서 "빠르게 진화하는 아테나"는 마치 요즘 광풍이 이는 AI 개발 트렌드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p285, p293에 "아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p279를 보면 u(우)가 그리스어에서는 부정어라는 말이 나옵니다. 퀴클롭스의 섬에서 오뒤세우스가 살아남은 건 자신의 이름을 우데이스(nobody)라고 거짓으로 가르쳐 준 기지 덕분이었는데, 베르베르가 이 1권 후반부에서 어떤 암시를 하는지는 저 고사를 알아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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