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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커플링과 공급망 전쟁 - 미중 전쟁과 뉴노멀 그리고 위기의 대한민국
이철 지음 / 처음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1990년대 세계는 바야흐로 냉전이 종식되고 이념으로 인한 소모적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듯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공연히 국경이라는 장벽 안에 갇혀 살지 말고, 여러나라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가장 싸게 만든 상품을 마음껏 소비하게 하자는, 이른바 자유무역의 오랜 이상, 수 세기 전 경제학자 리카도의 제안이 드디어 실현되는 듯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경쟁력으로 생산된 재화들을, 가장 유리한 가격에 즐기는 건 어쩌면 문명이라는 게 생긴 이래 인류가 언제나 꿈꿔 온 바이겠습니다. 국경 안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해 소수가 폭리를 취하는 행태도 자유무역의 확대 증진으로 상당 부분 방지할 수 있고 말입니다.
21세기 들어 중국이 정식으로 WTO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 무역 질서가 일원화하는 듯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산 저가 공산품이 세계 시장에 풀렸고, 이미 인건비가 오를 대로 오른 선진국에서는 비슷한 상품을 이 정도로 싸게 만들 수가 없었죠. 선진국도 중국에 이들 공산품 생산 면에서 깊이 의존하고, 중국은 이들 나라에 물건을 팔아야 하니 당연히 상호 의존 관계에 놓이던 게, 코로나 19 사태를 계기로 상호 불신이 심화되어 마침내 디커플링, 즉 동반 상태를 해소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코로나 지원금 때문에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고, 이제 중국산 물품의 수입마저 규제하고 들면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IRA 같은 법을 만들어서 외산품을 견제하고, 금리를 높여서 시중에 풀린 돈을 대거 회수하려 드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부터 이미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중국에 강경한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한 소치였다고 분석합니다.
또 미국 증시에 많은 중국 기업들이 상장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가증권시장에서 마련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에 비협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여러 중국 기업들이 미 증시에서 퇴출되었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감도 고조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 매체에도 보도가 된 객관적인 팩트이며, 여기에 저자는 "미국이 기술, 무역의 디커플링을 원하는 데 반해, 중국은 자본의 디커플링을 원한다"고 진단합니다. 월스트리트는 중국 기업에 투자하여 합법 비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반면, 중국은 이런 결과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정보를 공개해 가면서 미국 증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선택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일반의 인식은, 아직 미국에 얻을 것이 많다고 판단하는 중국이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고, 반면 미국은 길게 보아서 이런 관계는 손해이기 때문에 자국 내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라도 중국과 절연하려 드는 것 아니냐는 쪽입니다. 반면 저자께서는, 중국 역시도 미국과 절연을 강하게 원하는데, 1) 앞에서 말했듯이 자본 이득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고 2) 중국은 수천 년 중화 제국의 영화를 복원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대만을 무력 혹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병합하여 진정한 통일을 기도하는데, 이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미국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2)의 동인이, 밖에서 보는 이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될 만큼 중국한테는 매우 절박하다는 거죠.
미국도 이미 중국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했고, 다만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피한 채 10년 동안 경제 제재를 통해 말려죽이겠다(p149)는 전략으로 임할 것이라고 책에서는 내다봅니다. 그리고 이미 미국으로부터 심한 제재를 받는 중인, 러시아, 이란, 북한 등이 주축이 된 권역끼리 별개로 뭉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입니다. 러시아가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미국한테 오래 경제 제재를 받다 보니 버틸 재간이 없어 이판사판으로 치고나왔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튼 만약 중국이 미국과 유럽 중심의 권역에서 결정적으로 배제되면, 이른바 동방 시장(p150)이 형성되겠으며, 사우디, 미얀마 등이 이에 참여하면 그 규모는 결코 무시 못 할 정도라는 게 저자의 전망입니다.
만약 시장이 동방과 서방으로 완전히 갈라선다면, 공급망에 속하는 두 유형(p171) 중 어느 편이 유리한가? 격변기에는 가변원가형이 유리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구도가 안정화하면, 고정원가형 기업(중국식)이 더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이 판을 흔들어 놓으려 할 때, 단기적으로는 중국 여러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수 있어도, 나중에는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만 잔뜩 키워 놓고 끝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개별 기업의 이전에 치중할 게 아니라 전체 공급 사슬을 통째 이전하려는, 정부의 장기 비전과 전략이 중요하다"는 게 저자의 소결론입니다.
어느 진영에도 배타적으로 속하지 않고 양쪽에 한 발씩을 걸친 경제단위를 "교차 시장"이라 부릅니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는 이런 곳들이 새로운 도약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아세안, 그 중에서도 베트남을 꼽습니다. 인도도 중국과 적대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친서방도 아니므로(러시아와는 전통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어온) 교차 시장입니다. 이 교차 시장은, 한국이 중국에서 기업을 빼거나 할 일이 있을 때 대안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멕시코 역시 많은 인구와 잠재력을 보유했으며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므로 교차 시장입니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이미 알게모르게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곳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석유 거래가 달러 아닌 위안으로 이뤄졌을 때 드디어 달러 패권이 저물어가고 페트로달러에 균열이 생겼다며 미디어가 시끄러웠습니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SWIFT(국제 결제망) 축출이라는 제재가 내려졌을 때 오히려 대안 시스템의 등장으로 달러의 힘만 빠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p207의 사례를 보면 달러를 배제하고 루피와 루블의 직태환을 시도했던 2023년 3월의 러 - 인도 간 역사적 합의는 불과 2개월만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에너지 판매 대금으로 받은 인도 루피화를 누가 받아 주는 곳이 없어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봤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 유지되려면 러시아가 인도 상품을 많이 구입하는 구조라야 하는데 그건 인도 상품이 경쟁력이 없어 안 되겠고 말입니다. 위안화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달러의 시대가 아직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는 강력한 반증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결론 하나를 도출하는데, 무엇이 기축 통화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무역이 아니라 금융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p292~p323에서는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그야말로 대혈전 과정이 설명됩니다. 전쟁이란 꼭 창과 칼을 쥐고 비행기와 탱크가 부딪히는 것만 전쟁이 아니라, 핵심적인 산업 섹터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를 놓고 대중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막후에서 이처럼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최근 미국의 태도에 격분하여 자체 인력을 양성하려는 등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으나 현재 상황은 매우 좋지 못하다고 나오는데, 최근이 아니라 이미 십 년 전부터 반도체굴기를 내세웠으나 여전히 첨단기술, 고부가가치 영역에서는 이처럼 성과가 지지부진한 게 현실입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만약 중국측 파트너에게 모든 지분을 넘긴다면 애써 일군 성과를 헐값에 처분하는 셈이 되어 손해가 큽니다. 혹 이를 제3국 사업가에게 양도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시장의 진영화에 대응하는 전략도, 한쪽을 버리고 한쪽에만 완전히 가담하는 방법, 각 시장을 상대하는 별개 법인을 만들어 분리 대응하는 방법(일본의 많은 기업들이 이미 이렇게 한다고 나오네요) 등 여러 가지로 모색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격변의 시대에 한국 같은 작은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정말 큰 지혜가 필요하겠음을 절감한 독서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