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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의 햇빛 일기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0월
평점 :
이해인 수녀님은 이미 1980년대부터 많은 베스트셀러 시집을 내시고 한국인들의 척박해진 마음을 고유의 맑은 시심으로 어루만지신, 국민 시인이라 불려 손색이 없으신 그런 문인입니다. 수녀님의 작품은 남녀노소 누가 읽어도 마음에 바로, 쉽게 와 닿으며 공감되는, 탁월하고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는 언어로 이뤄졌다고 평가 받습니다. 긴 말이 필요 없이, 수녀님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눈의 먼 시야가 절로 트이는 듯 상쾌한 감동을 누구나 느끼게 됩니다. 오랜만에 나온 이번 신작 시집은 출판사 열림원에서 예쁘고 자그마한 양장본으로 나와서 소장 가치를 더욱 높이는 듯합니다.
p36의 <여름일기>. "누가 건네주는/메o나 아이스크림/빛깔이 마음이 들어/기쁨 또한 연둣빛으로/녹아버리네" 작품 중에 언급되는 어떤 바형 아이스크림은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국민적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인데, 맛도 좋지만 그 독특한 향과 색깔도 인기의 요인 중 하나인 듯합니다. 기쁨이란 게 누군가의 마음에 고형(固形)으로 남기만 해서는 그것도 곤란하며, 마음에 스며들어 오래 남게끔 "녹아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녹아든 기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파도 빠를 것입니다.
p49의 <꿈 일기 I>. 어쩌다가 꿈에, 오랜 동안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지인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회 생활이라는 게 다 그래서, 회사에서 매일같이 보는 동료나 상사는 지긋지긋한 진상일 경우가 많은 반면, 꼭 만났으면 하는 그리운 사람은 어쩌다 마지막 연락처까지 없어진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혹 만난다 해도 뭔가 쑥스러워서 마음에 있는 말을 면전에서 차마 못 하는데, 꿈에서는 그 못 할 말을 남김없이 건네곤 합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서도 생생해서/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입니다. 고작 꿈에서 봤을 뿐인데도 이렇게 반가운 그 사람, 언젠가는 정말로 만나 보고 말 것입니다.
p65의 <얼음 예찬>. 어리셨던 시절 수녀님의 별명은 "얼음공주"이셨다고 합니다. 책표지에 나온 사진의 이미지도 그렇고 우리 독자들로서는 좀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여튼 사실이니까 담담하게 털어 놓으시는 모습에서도 확실히 쿨하시고 소탈하신 수녀님의 면모가 확인됩니다. ㅎㅎ 우리 같으면 누가 흉이라도 볼까봐 안 꺼낼 얘기인데도 말입니다. 여튼, 어느 수녀님께서 선종하시기 전 마지막 소원 삼아 입에 한 조각 넣어 달라고 하셨다는 얼음 한 조각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망인의 입 안에 금화 한 닢을 넣어 저승의 뱃사공 카론에게 줄 노자로 삼게 했다고 하죠. 입 안에 들 얼음은 살아서는 금세 녹아 없어질 운명이지만 죽어서는 육신의 선도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게 돕는 매체일지 모릅니다. 서늘하면서도 정신의 열기를 꺼지지 않게 돕는 얼음의 본성에서, 우리 역시 정열과 냉철함 사아 균형을 잡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p96의 <노년 일기>. 젋은 시절 찍은 사진은 아 나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같은 애상에 잠기게 하는, 약간은 덧없고 슬픈 감정의 촉발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젊어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혜로우셨기에, 현재의 나에게 "자연스러워요, 괜찮아요. 원래 그런 거에요."라며 의젓하시게 위로를 건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들도, 젊었을 때 생각 외로 수녀님처럼 생각이 깊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도 덤덤하게 수용했다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뭐가 더 서럽거나 조급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얼굴이 잘 붓는 이유는 의학적으로야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상식으로 퉁치면 몸 여기저기에 독소가 많아서일 수 있습니다. p113을 보면 작품 <독을 빼는 일> 속에, 수녀님은 인생 곳곳에서 터득한 통찰과 지혜를 표현하십니다. 약을 복용하고 독을 빼면 정말로 그만큼 깨끗해지는 걸까? 수녀님은 당연해 보이는 이치에도 오히려 의문 한 점을 품습니다. 어쩌면 내 안에 남은 독도 나의 일부이며, 얼굴이 붓든 빠져서 핼쑥해지든 그 모두가 내 살아온 흔적이요 정직한 자국입니다. 마음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순수에 합일해야 몸의 독소도 진정으로 제거되는 것이며 약을 써서 일시적으로 제거한다 한들 그 자리는 도로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p193에는 <의사의 기도>가 나옵니다. 환자들은 의사에게 슈퍼맨을 기대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너무 크니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그렇다 해도 어떤 환자들은 너무 심합니다. 그래도 아픈 사람을 낫우는 직분인 의사는 부당한 상황도 운명적으로 감수해야 할 때가 많겠는데, 수녀님도 자연스럽게 시적 화자인 의사의 내러티브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때조차 괜한 오해를 받곤 할 때 걀국 기댈 곳은 절대자의 주재입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착해지면 공연히 신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적어질 텐데 그게 그렇게나 힘들어서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