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인생 꽃밭 - 소설가 최인호 10주기 추모 에디션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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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는 1970년대에 많은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였으며, 책날개 설명에도 나오듯 서울고 2년 재학 중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낸, 비상한 두뇌와 감성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활동 기간 전체에 걸쳐 엄청난 다작을 한 분인데, 스스로도 어느 인터뷰에서 "제가 원래 괴물이었어요."라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랬던 그가 10년 전에 타계했고, 당시 이문열 작가도 아쉬움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이문열씨와는 불과 세 살 차이인데 최인호 작가가 워낙 이른 시기에 데뷔했고 적어도 양적으로는 이문열 작가를 압도하는 활동상이었으므로 마치 세대 자체가 다른 양 착시를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여태 책좋사 책프에 그의 작품을 24기 48주차, 25기 14주차, 25기 24주차 등 세 차례에 걸쳐 리뷰하기도 했습니다. 

"누굴 물로 보냐?", "물 먹었다" 같은 말이 있을 만큼, 원래부터 깨끗한 물이 흔했던 한국에서는 알맹이 없고 시장가치도 부족한 걸 두고 "물"이란 보조관념을 자주 씁니다. 아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하려면 고급 한우 세트나 백화점 상품권 같은, 시중에서 쳐주는 아이템을 흔히 떠올리지만 최인호 작가는 어느 사제로부터 물 한 통을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비아냥이 아니라, 수도원 물 맛이 너무 좋아서 들고 왔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최인호 작가는 프랑스 3대 고전주의 희곡 작가 코르네유를 인용하며, "선물은 물건보다 그 방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상황과 센스에 따라 물 한 병도 훌륭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다만 이걸 아무나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는 오히려 욕만 먹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저는 어느 서양 고전을 읽으면서 "자부심에서 유래한 찌푸린 표정"이란 구절을 읽은 적 있습니다. 스스로가 지성인이므로 주위의 "자신만 못한 사람들과 세태"가 한심하고 못마땅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 사람의 자부심과 그런 판단이 객관적으로 옳냐는 건 또 별개 문제입니다). 최 작가의 아드님이 부친더러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미간의 주름을 없애라"고 충고했다는 대목에서, 저는 예전에 읽었던 그 구절의 실제 구현태가 바로 최인호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예전 분이므로 제가 미디어나 실물을 본 적은 없으니). 

물론 그저 지극한 작가적 고민의 흔적일 수도 있고 성격의 자취일 수도 있고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인호 작가는, 살벌한 자본주의적 생존 경쟁이 전개되는 한국 같은 곳에서 내심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자신 같은 경우가 유리할 바는 별로 없었다는 취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물론 독자가 읽기에 재미있었다는 것이고 작가님 본인은 쓰디쓴 체험의 회고일 수 있습니다. 

"신문을 보지 않으니 세상 살기가 편해졌다." 사실 이 구절은, 1970~80년대 내내 어느 신문이건 문화면 연재소설란을 독점하다시피했던 최인호 작가님의 말씀이라 생각하면 정말 역설적입니다. 글을 읽어 보면 무슨 말씀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최 작가님도 어렸을 때는 세상을 읽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창이 신문이었을 테고 신문에 기고하는 작가나 저널리스트가 스승 격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분이 신문을 끊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는 독자가 새겨서 읽어야겠죠. 

그런데,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모든 소식들이 이 정도로 불편해진다면 사실 세상에의 적응이 힘들어진다는 위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전 정운경 화백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분도 대략 비슷한 시기(20년 전)에 중앙일보의 <왈순아지매> 연재를 중단했었지요. 트렌드가 내게 유쾌하건 불쾌하건 이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므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정면으로 대하고 싸우든지 얹혀가든지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로들은 몰라도 젊은 세대라면 대응 방식이 이래서는 곤란하겠습니다. 

애써서 집안을 꾸미는 건 가정주부의 큰 낙 중 하나이며 어쩌면 의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을 보고 큰 위안을 얻습니다. 작가님의 사모님(황정숙 여사. p197)께서는 한국에서도 손 꼽는 살림꾼이셨는데(원로배우 안성기씨 사모님도 인정하셨다고 작가님 며느님이 증언하십니다) 어느때부터인가 방치하시는 걸로 스타일이 바뀌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님이 옮아가는 화제가 기가 막힙니다. 그는 고골리(19세기 작가 니콜라이 고골)와 한용운을 인용하며 하늘이야말로 꾸미지 않아도 최고의 경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지 않냐며, 치장과 정돈에의 강박 역시 인간의 부질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며 달관의 경지를 드러냅니다.    

음식은 꾸준하게, 음미해 가며 섭취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인생의 여유와 낙을 알아보는 소치이기도 하고 건강에도 이롭습니다. 그런데 최인호 작가님께서는 그런 습관이 안 드신 자신을 자책하시는 듯한 대목이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확실히 작가님이나 동시대 어르신들이나 너무나도 바쁜 세상을 살아오셨습니다. 어디 작가님뿐이겠습니까. 작가님의 아드님 세대에 이르러서는, 좋은 음식의 웅숭깊은 맛을 지긋이 음미하며 살아가는 여유가 한국인 다들 몸에 밸 수 있을까요. 언제쯤이나 속전속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중립의 초례청에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신동엽 시인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입니다. 최인호 작가는 이 시구(詩句)를 인용하며, 역사의 큰 흐름을 보고 모든 소아적 갈등과 비생산적 감정을 대승적 민족애로 승화하여 보다 큰 대의를 바라보자고 역설합니다. 책 전체에는 품격 있고 우아한, 인생의 소소하다면 소소한 측면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큰 스케일의 교훈을 캐치하고 잠시 숙연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문장이 무슨 한국어의 교과서처럼 정확하고 아름답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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