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 의사의 사계절
문푸른 지음 / 모모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저자 문푸른 선생님은 어려서 글쓰기와 별보기를 즐기던 꿈 많은 소년이었고, 다른 전공(천문학)을 선택하셨다가 "세상에 더 도움이 되고 싶어" 의사가 되셨다고 책날개에 나오네요. 국문학과 천문학, 의학 모두 어린 시절 누구나 깊이 공부하고 싶어들 하는 학문이고 보면, 문푸른 선생님이야말로 도전을 통해 남들이 선망하는 길을 몇 걸음 몸소 걸어 보셨거나, 손수 완성해 내신, 참으로 축복 받은 인생이 아니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어 보니... 이 세상 누구라도 그 길에 굴곡과 애환이 있다는 점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네요.
멋진 의사분과 결혼하여 알콩달콩 살아가는 삶은 어떤 여성이라도 선망할 만하지만 p99에 나오듯이 "신혼 1년차 남편을 병원에서 잃어버린 새댁"으로 사는 게 또한 현실입니다. 의사로서 무의촌 중 하나인 섬에서의 근무라는 게 여러 편의 시설이 없는 것만으로도 견다기 힘들겠지만(광주가 마치 뉴욕처럼 보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지역 특유의 텃세, 정치 구도 등에 휘말려 공연히 의사 선생님을 불편하게 하는 여러 상황이 더 난감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 그 이장 모임에는 가고 나한테는 안 오는 거요? 무시하는 거요?(p81, 그리고 p224)"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들 도우려 애 쓰시는 분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요? 읽으면서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p105 이하의 진상 환자 이야기는 더 기가 막혔습니다.
무의촌 낙도로 발령나는 일은 속마음으로야 어떤 의사라도 "제발 이 쓰디쓴 잔이 나를 비껴갔으면"하고 바랄 만합니다. 900분 중 한 분이라도 먼저 지원하면, 내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므로(299/899) 깊은 감사를 마음 속으로 표시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군의관 시절의 추억 아닌 추억입니다. 입대 전 와인을 사 들고 여자친구의 방을 방문하며 술김에 두 사람이 모두 과감(p48)해지는 건 여느 젊은 커플의 사정과도 비슷합니다. 여자친구분은, 인턴을 저자께서 수료한 날(p34) 특별히 더 가까워진, 그전까지는 책에서 J 간호사라 불리던 분입니다. p260, p264에, 2월 겨울에 그분을 처음 보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통속 드라마 같은 데서 어떻게 묘사되건 무관하게, 의사 간호사 커플은 제3자가 보기에 든든하고 흐뭇합니다.
참, 여자친구 한 명과 소중 하게 연을 가꿔 나가는 일은 의사 선생님한테도 쉽지 않습니다. 원래 발레리나였던 분이 부상 때문에 간호사가 되셨다고 책에 나오는데 간호사 일이 어디 좀 힘듭니까. 게다가 직장 내 갈등(p117), 이른바 태움 등 고유의 고충이 있다고 일반인들도 다 알 정도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직전 여자친구 P라는 분이 저자께 원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냥 순하실 것 같은데 "아니, 이번에 광주에 온 김에 확실하게 만나서 끝내야겠어(p97)."라든가, 헤어지고 더 잘된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고 만다는 말씀(p101)에는 약간 무서워지기도 했네요.
그런데 이렇게 단호해진 건, 과거를 단호하게 정리하고 현재의 J님께 더 당당한 연인이 되고 말겠다는 동기가 더 강했던 게 아닐까 싶어서 좀 멋있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남자라면 이래야죠. p154에 보면 J님한테 무릎을 꿇고, 그녀는 인턴 때 날 찼던 여자이며 아무 관계도 현재는 아니라고 밝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독자로서 섬마을 의사 선생님의 희생과 고충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속물처럼 연애 스토리만 쫓아가는 제 자신이 한심하게도 느껴졌으나 뭐 재미있는데 어쩌겠습니까.
섬에는 섬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라 관광객들도 옵니다. 의사들은 이 사람들도 진료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참 별 희한한 일을 다 겪으십니다. 책을 읽으며 우리 나라에는 도시건 시골이건 성격이 특이한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p193을 보면 J님을 치료하며(간호사도 누군가의 간호를 받아야 합니다) 아플 때 왜 얼굴이 창백해지는지를 후방에 군대가 모두 내려가 있는 상황에 비유하는 대목이 있는데 역시 군의관 출신 다우시다 싶었습니다. 같이 근무한 치과의사분과 한의사분에 대해 저자가 술회하는 대목(p204)에서도 독자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다 그러신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섬에서 공중보건의로 지내다 보니 섬 사람이 다 되었고 그래서 섬 사람들과, 특히 닥터 S 님과 헤어지는 게 무척 아쉬웠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진짜 아프게 한 건 그 헤어짐뿐이 아니라... 특이하게 J님의 시선에서 쓰는 짧은 문단도 있는데 이 때문에 문학 작품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문학 맞지만). 후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