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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주의 첫 순간 - 빅뱅의 발견부터 암흑물질까지 현대 우주론의 중요한 문제들
댄 후퍼 지음, 배지은 옮김 / 해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절판
모든 사물, 사건, 존재에는 "처음"이라는 게 있습니다. 신(神)은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런 초월적 현상에 대해서는 증명도 반박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디디고 호흡하며 살아가는 물리적 우주에는 분명 시작이라는 게 있었다고 생각되며, 다만 인간이라는 개체가 너무도 짧은 삶을 살다 갈 뿐이니 긴 세월(유한)과 무한을 미처 분별하지 못할 뿐입니다.
대중과학저술가와 최일선 개척의 학자 역할을 두루 겸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댄 후퍼 박사의 책을 그간 읽어 온 독자들도 압니다. 특정 분야의 최첨단 사항을 연구하는 것도 예사 두뇌로 가능한 일이 아닌데, 우리 어리석은 일반 독자에게 그 어려운 물리학 내용을 잘 알아듣게끔 쉬운 언어로 풀어 가르친다는 게 또 어디 쉽겠습니까. 이분은 그 어려운 걸 해 내는 분이시기에 신간이 나오면 우리 독자들은 믿고 읽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는 "At the edge of Time"입니다. 시간의 경계(모서리)... 시간이니 공간이라는 게 절대적이고 무한히 펼쳐졌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 유한하다는 게 이미 알려졌고(그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물리학의 과제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적 성격을 규명한 이래 시간 역시 유한하다(시작점이라는 게 있다)는 데에 대부분이 동의합니다. 이 책에 아주 잘 나오듯 정작 아인슈타인은 정적(靜的. static)인 우주상에 집착했지만 말입니다. "시작"이란 말도 물리적 시간의 익숙한 속성을 감성적으로(?) 드러낼 뿐이니 저자처럼 그저 "edge"라고 언명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구 소련 포함)에는 괴짜 천재 과학자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p58 이하를 보면 알렉산드르 프리드먼(성씨로 보아 유대계인 듯합니다)이, 아인슈타인마저도 수축이나 팽창이 아닌 안정(고정)성을 가정하였으나(저자에 의하면, "딱히 근거도 없이"), 이 젊은 천재는 거꾸로 "우주는 팽창하거나, 아니면 수축 중이라야 한다"고 직관했습니다. 이렇게 중간과정을 뛰어넘어 결론으로 바로 치닫는 능력이야말로 천재들의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도 그의 치밀한 계산과 논증에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프리드먼의 방정식이야말로 그 모든 것에 시작이라는 게 한때 있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성과였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르메르트 신부가 등장합니다. 물론 빅뱅 이론을 주창한 바로 그분입니다.빅뱅 직후 엄청난 밀도로 꽁꽁 뭉쳐 있던 우주는 팽창하면서 서서히 밀도가 낮아지고 온도도 낮아집니다. 빅뱅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면 이렇게 진행되었고 그렇게 갈 것이라는 게 상식입니다. p87에서는 우주론적 적색이동이 간단히 설명되는데 역시 긴 말 필요 없이 핵심만 명쾌하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게 후퍼 박사 답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현대물리학에서 4대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입니다. 이 구도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유 쿼크, 자유 글루온 같은 말들이 듣기만 해도 형용모순 같습니다. 쿼크나 글루온처럼 단단히 묶여 있는 녀석들이 또 어디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빅뱅 직후 몇 초 간은 놀랍게도 이게 가능했으며(p124), 힉스 입자가 규명된지 10년여가 지났지만, 저자는 또다른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를 미스테리온이라 새로 부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냅니다. 천재의 상상력은 이처럼 자유롭습니다.
1928년에 천재 폴 디랙이 반물질(antimatter)를 처음 거론하고 이후 이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데에 가의 중론이 모아졌습니다. 중성자의 반물질이라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저자는 그런 질문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중성자 안의 세 쿼크가 양, 음 전하를 띠는 상황을 가르치고, 각각에 반대되는 반물질이 이론적으로 아무 모순 없이 존재 가능하다고 알려 줍니다. 이런 원주가 있어서 후퍼 박사의 책은 더욱 매력적입니다.
"관측 결과에 따라 우리의 선입견을 바꾸어야 할 때 과학은 가장 많이 발전한다(p166)." 이론, 혹은 절대 도그마가 먼저 존재하고 실험, 실측이 그 뒤를 따라야(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격) 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야 옳습니다(p222의 파인만 명언도 참조). 그러나 실험과 관측 결과에 대한 해석은 반드시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이 역시 논리와 상식의 다양한 갈래에 따라 여러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암흑 물질은 아인슈타인이 역시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예견했고 한동안 무시, 폄훼되다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 받습니다. p191을 보면 저자는 이른바 "산란 단면적(scattering cross section)" 개념을 이용하여 실험 결과들을 해석했던 통쾌한 과거를 회상합니다. 실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상력 부족, 선입견에의 집착이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저자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다(p221)." 약력은 중력(우리의 발끝을 그렇게도 옭아매는)보다 엄청나게 강합니다. 이런 계층 문제의 역설을 극복 못하면 약력을 실험에서 검출하기도 힘들고 힉스 입자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초대칭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이 역설의 장벽을 넘는 하나의 전략 노릇을 했습니다. 또 이 초대칭 이론으로부터,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끈 이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p241에서는 우주 급팽창 이론이 설명되는데 인플레이션 이론이라고도 하죠. 미치오 가쿠의 <평행 우주>에 이 이론의 탄생 과정이 재미있게 회고됩니다.
급팽창도 한 가지 입장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학자들은 여러 모형들을 제안해 왔습니다. 여러 양자장을 포함하는 모형들(p266)은 비 가우시안성을 상정한다고 서술되는데, 역주를 통해 가우시안과 비 가우시안이 각각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줍니다. 얼핏 들어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다중 우주 이론은, 암흑 에너지라는 미스테리한 사항을 캐어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자연스럽게 정당화됩니다. 논리와 실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재 물리학자의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우주는 결코 고정되고, 갑갑한 모습으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