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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상품과 세계 통화 ㅣ 월가의 영웅들 6
벤저민 그레이엄 지음, 김인정 옮김 / 페이지2(page2) / 2023년 9월
평점 :
인간은 경제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효용은 다른 것(상품)에서 얻고도, 거래는 그를 상징하는 것(화폐)를 통하여 행하는데 마치 후자가 진짜 만족을 주는 양 착각합니다. 허나 만약 무인도에 고립이라도 된다면 그가 가진 수백만 달러 지폐 다발은 (추위가 닥칠 때 땔감의 용도 말고는) 아무런 효용을 그에게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화폐의 막강한 기능 때문에 종종 이 점을 잊습니다.
이 책은, 서문 p19에 잘 나오듯,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9월에 저술되었습니다. 이미 추축국의 패배는 기정사실화했고, 전후 세계 경제 질서는 어떤 대원칙에 의해 작동되게 할지 연합국 측의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비록 승리를 앞두었다고는 하나 영국의 파운드는 크게 힘을 잃을 게 자명하여 더 이상 거래의 표준이 되기 힘들었고, 파운드의 쇠락 이전에 이미 이를 찍어내는 영국의 국부(國富)가 크게 축난 상태였습니다. 전후 세계 경제는 막강한 생산량을 입증해 보인 미국의 달러가 주도해야 했고, 그 달러의 신인(信認)은 그 나라(즉 미국)가 가진 막강한 상품(commodity)의 양이 뒷받침하게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이 고전의 제목에 쓰인,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 세계 상품과 세계 통화라는 말들은 그런 맥락으로 새겨야 하겠습니다.
세계 통화는 아무래도 현 시점에서 미국의 달러화가 가장 그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세계 상품은 무슨 뜻일까요?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전 유럽을 사로잡았을 때 유독 스코틀랜드 사람 애덤 스미스만이, 한 나라의 부(富)는 보유한 금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이 지닌 갖가지 재화와 서비스가 결정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평화시에는 그 재화와 서비스를 국민들이 향유하니 그게 부유함의 척도요, 전시에는 배, 말, 총포, 식량으로 전쟁을 직접 수행하거나 군인들의 수요를 대니 그게 곧 국부입니다. 금을 씹어먹거나 금괴로 적군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식으로 싸움에 임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화폐는 실제로 쓸모가 있는 상품을 상징할 뿐이니, 화폐의 진정한 가치는 특정 상품(경우에 따라 제한적으로 화폐 구실도 직접 행할 수 있는)에 의해 담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에도 배어 있습니다. 물론 금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오늘날 선물(future)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상품들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80여년 전 벤저민 그레이엄이 찍어 준 상품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날카로운 이익 추구 본능이 그 품목을 정하긴 합니다만.
17세기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의 강자로 발돋음하자 영국은 대뜸 각종 세법상의 규제를 반포하여 상대방을 견제하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여 주저앉히고 이후 3백년 동안 패권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이러던 영국이, 20세기 신흥 강국 미국의 관세 조치에 대해서는 얼마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p41의 이코노미스트 誌 기사(1943) 인용에 잘 나옵니다. 아무튼 관세는 자유무역의 숙명적 원수이며, 1990년대 내내 그렇게나 관세철폐, 자유무역의 이상을 노래했건만 기어이 최근 다시 퇴행을 보이는 중입니다.
책에는 "국제 연맹"이라는 단체가 종종 언급됩니다. League of Nations는 아직 유엔에 의해 대체되기 전이며, 비록 추축국들에 의해 유명무실화했으나 아직도 유일한 최상위 국제 협의체로 제한적 기능을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p40에는 무역 장벽 때문에 국제무역 불균형이 생기는 게 아니라, 국제무역의 불균형 때문에 무역장벽이 생긴다는 저자 벤저민 그레이엄의 유명한 언명이 나옵니다. 이미 국제 무역 구조 자체에 심각한 모순이 존재하는데, 각국더러 관세 장벽만 철폐하란다고 그게 효과가 나겠냐는 뜻입니다. 각국 정부들도 자국 내 여러 정파들의 반대 때문에 그런 조치를 단행하기도 어렵고 말입니다.
21세기인 현재도 석유처럼 중요한 자원에 대해서는 강대국과 산유국 수뇌부들이 수시로 협의를 거쳐 감산, 증산 여부를 결정합니다만 이게 어떤 통일된 행동으로 이어지기 매우 어렵습니다. 저자는 1944년에 대두되었던, 가격 안정화를 위해 여러 상품의 생산을 적정 선에서 규율하려던 국제 상품 협정을 p88에서 언급하며, 그 성사 여부와 장래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표명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펴 봐도, 아 저 시기에는 참으로 이상적,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석유 하나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들의 이해가 충돌하여 그 조율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주요 상품과 원자재에 한정한다 해도 그걸 어떻게 일일이 협정으로 통제하겠습니까?
상평창은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우기로 고려의 물가 조절 기관이었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고려 시대에 대해 뭘 알았을 리 없지만, p113에서 그는 ICC라는 국제 회사(corporation)를 설립하여, 특정 상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앙등한다고 여겨지면 이 회사의 재고를 시중에 풀고, 그 반대의 경우는 사들이는 기능을 수행하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니 이 한국어판 역자가 이를 상평창에 비유한 건 매우 적절하며, 구태여 차이를 꼽자면 이는 일종의 영리 추구 조직이므로 오로지 공익만 추구하게 동작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이겠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식의 문제 해결 접근은 완전히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본래 경제 사상이나 아이디어는 돌고도는 법이니 세월이 많이 흐르면 이 비슷한 제안이 IMF 연계로 다시 어디서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글로벌한 계획이 잘 진행되려면 각국의 생산량, 소비량에 대해 정확한 통계 자료가 available하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하는데, p157에 나오듯 러시아와 중국이 이때에도 문제였습니다. 단, 이들 국가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때와 지금이 상당히 다른데, 지금은 이 두 국가가 국제 분업 체제에 상당히 편입된 상태에서 다만 주류 국가들과 다른 지향성을 지닌 탓이고, 저때에는 러시아(소련이 정확한 명칭이겠지만)는 공산주의 체제라서 아예 세계 무역 구조와 분리된 자립경제를 추구했고, 중국은 장개석 정부가 아직 전국을 완전히 장악 못 한 데다 일본에 침략까지 당한 터라 통계 산출 등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었겠죠.
이무렵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막 출범하려던 시기였습니다. 달러기축, 금태환, 고정환율 등을 핵심 속성으로 삼았던 이 시스템은 1970년대 들어 달러화 가치 하락을 도저히 방어할 수 없었던 미국이 금 태환을 일방적으로 중단 선언하면서 붕괴했습니다. 이제 페트로 달러마저 큰 균열이 생겨가는 요즘, 그저 각 경제 주체 사이의 치열한 눈치 게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이 유지되는 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게 상품 시장, 화폐(외환) 시장의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종의 일반균형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에 활동한 벤저민 그레이엄 같은 현자가 오늘날의 이 불안정한 경제현실을 보면 과연 어떤 소회를 피력할지가 새삼 궁금해지는, 유익한 고전 독서였습니다.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