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사과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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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부 유럽에서 토마토를 전통적으로 "늑대의 사과"라 불러왔다는 사실은, 최인 작가님의 이 신작 소설 머리말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보면 그 서두에 고래에 대한 온갖 인용문을 다 갖춰 놓고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 소설의 시작도 그와 닮아 보입니다. 최인 작가님의 전작을 읽은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동서 고금의 숱한 명문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그 출처까지 명기하는 게 작가님의 스타일이며, 이 신작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이하게도 이번 소설은 탈북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최인 작가님 소설 주인공들이 치밀한 사색가이며 빼어난 지적 능력을 지녔으나 현실의 모순을 겪고 고민하는 특징이었는데, 이 소설도 그 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남자 주인공은 그에게 매혹된 여성들과 농도 짙은 로맨스를 즐기는데,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묘사는 대단히 노골적으로 흐르기도 하며, 다만 전작들에서는 묵직하고 심도 있는 사고의 흐름을 독자가 좇느라 성애적 서술이 살짝 묻히기도 했다면, 이 신작은 그런 대목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다릅니다. 

p31에서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병호라는 젊은이는 지나치게 학교 성적에만 집착하는 모친 때문에 매우 잔인한 성정으로 자라납니다. <문명, 그 화려한 역설>에서 주인공 모제가 그 모친과 갈등을 겪는 설정과 닮았습니다.  

휘는 OLED 스크린(p81)은 한때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는 약간 인기가 시들해진 홈시어터 아이템입니다. 페시와 함께 커플시네마의 어느 객실에 들어선 주인공은 클로이 모레츠가 주연한 뱀파이어 영화 <렛미인>을 관람합니다. 이 특이한 상황에서 영화 속 매혹적인 흡혈귀가 빨간 입을 하고서 희생자의 피를 빠는 장면은 그에게 묘한 자극을 가합니다. 무엇인가에 탐닉하여 현실의 부적응 상태로부터 도피할 필요가 있었던 그에게 이 장면의 시청은 일종의 전기가 됩니다. 때마침 그가 투자했던 유니드코리아(가상)라는 종목이 상장폐지되자 그는 재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 

구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게 유일한 창작의 기조이자 방침이었습니다. p124에 나오듯 북한에서는 당성, 사상성만이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인 반면, 남한에서는 오로지 시장성만이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데, 아마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이처럼 저속한 대중의 기호만으로 작품성을 평가했던 공간은 없을 듯합니다. 허먼 멜빌의 그 장대한 우주도 21세기 한국에서라면 그저 지루하다고 쓰레기 취급이나 받았을 것입니다. 

전작 <문명, 그 화려한...>에서도 주인공들이 묘한 업소에 들어가서 기이한 환락 체험을 한 후 궁극의 허무를 맛 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p109 이하에 팔루스 카페라는 희한한 곳에 입장하여 겪는 일들이 서술됩니다. 팔루스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면 이후에 벌어질 사건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죠. 공교롭게도 고양이박쥐가면 역시 부친이 실향민이라서 키즈와 접점 하나가 생깁니다. 그녀의 본명은 "미소"였으며 출판사 사장의 딸인 덕에 남한 출판계의 생리를 훤히 꿰고 있습니다.     

"남조가 교회에 불을 질렀다고?(p162)" 표기는 피를 빠는 느낌이 생생하게 서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엽기 행각에 빠졌는데, 마치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했던 김동인의 작품들(<광화사>, <광염 소나타>)에 나오는 화가나 음악가들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한 작품들을 남기기 위해 그들은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고 결국 인간적 파멸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원래 선했던 주인공들을 극단적인 범죄자로 몰아가는 원인은 (김동인 작품들에서와는 달리) 한국 자본주의의 지독한 천민성이라는 게 큰 차이점인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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