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열림원 세계문학 1
헤르만 헤세 지음, 김연신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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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청소년기를 겪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청소년기를 어떻게 무사히 넘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전체 빛깔이 결정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무렵은 생각도 의지도 부족하고, 감정도 너무나 불안정합니다. 이럴 때 데미안처럼 성숙하고 유능하며 안정된 친구 겸 멘토가 있어서, 내가 혹 나쁜 길을 걷지 않게 잘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이런 신적(神的)인 친구에게만 지나치게 기대어도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는 데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직접 이겨내야 할 시련이라는 게 인생에서 찾아오는데, 대개는 그걸 자기 혼자 힘으로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시선, 우월하고 꿰뚫어보는 사람의 시선(p62)." 솔직히 말하면, 청소년기의 느낌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조금 키가 커도, 옷만 잘 차려 입어도 동년배가 한없이 우월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함부로 볼 사람이 아닌데 우연한 동작 실수나 침체된 표정 때문에 그를 깔보고 들 때도 있죠. 하지만 이 대목에서 싱클레어가 본 데미안의 범상치 않은 풍채는 아마 진짜였겠습니다. 물론 우리 독자들은 여기가 싱클레어가 불량배 크로머를 만나 협박을 받은 직후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어린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한없이 큰 존재였듯, 크로머 역시 내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악마와도 같은 압제자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이런 걸 어렸을 때 만나면 애의 내면에 패배의식과 큰 그늘이 지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세상은 본래 거친 곳이니 이 역시 본인이 넘어야 할 하나의 장벽입니다. 그건그렇고 싱클레어에게 누이를 데려오라고 강요하는 크로머 녀석의 언행을 보니, 어른도 혀를 내두를 만한 악당 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데려오면 지가 뭘 어쩌려는 걸까요? 이런 놈은 어려서부터 정신이 쏙 들도록 혼을 내 줘야 커서 괴물이 안 될 텐데 말입니다. 

고전인 이 책을 어설프게든 꼼꼼하게든 이미 읽은 이들이 많기에, 데미안과 그 모친이 뭔가 예사롭지 않게 애증이 교차하는 긴장된 관계라는 점도 우리는 압니다. p96에 나오듯 "잠시 작아진 눈을 하고" 데미안은 생각에 잠깁니다. 꼭 크로머 건이 아니었다고 해도, 싱클레어는 그 나름대로 여기저기서 삶이 만만치 읺다는 걸 구태여 회피하지 않고 고민하며 수용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교에 기댈 만도 했건만, 싱클레어 특유의 유약하면서도 고집 센 기질은 또 종교까지 슬쩍슬쩍 밀어내는 듯합니다. 그 종교의 빈틈을 데미안이 파고들어왔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여튼 데미안만의 그 독특한 정신세계가 여린 싱클레어 영혼의 큰 부분을 한껏 장악했음은 분명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향수가 눈뜨는 순간이었다(p124)." 이 작품이 비범한 성장소설인 이유는, 그 압도적이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지닌 데미안이란 존재 앞에 그저 순종하거나 흡수되지 않고,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덜 예쁘면 덜 예쁜 대로, 싱클레어는 결국 자신만의 길을 힘들게나마 자신의 두 발로 걸어나가는 쪽을 꿋꿋하게 선택했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사실 크로머 같은 악(惡)의 찌질한 구현체가 아니라, 오히려 데미안 같은 올바르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신적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기이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에게 아브락사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제 싱클레어는 야곱의 싸움이라는 화두에 사로잡힙니다.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입니다! 그는 신이자 악마이며, 밝고 어두운 세계를 다 자기 속에 갖고 있죠(p174)."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기독교 구약의 야곱은 원래 장자가 아니어서 큰 축복을 받을 신분이 아니었고 곁다리 인생으로 그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기발한 꾀를 써서 장자의 몫을 가로채었고 나중에는 브니엘에서 신(천사라고도 합니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씨름을 하여 이겨, 운명에서 정해 준 바까지 변경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처럼 악착 같은 면이 있어야 인생에서 어떤 성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계가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다는 걸 난 몰랐었다. 나는 내면에 잠적하여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었다.(p220)" 싱클레어가 아주 어렸을 때 보고 느꼈던 그 아름답고 희망에 가득했던 세상은, 크로머 같은 추악한 괴물을 접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싱클레어 앞에서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싱클레어 역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었던 건데... 사실 세상은 주관적으로 싱클레어가 어찌 느끼든 무관하게 항상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세상의 선한 점과 악한 점을 있는 그대로 가려 가며 대할 줄 알게 된 싱클레어는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된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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