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열림원 세계문학 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이호철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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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내의 사진을 세 차례 본 적 있다(p9)." 이제는 이 고전의 저 첫 문장도 모범적인 서두의 한 예로 꼽혀야 하지 싶습니다. 사진은 물론 그 사람의 정직한 모습을 담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빛의 조작물입니다. 그렇기에 사진은 그 피사체에 대해 대체적인 진실을 말하지만, 어느 한 국면을 극단적으로 부풀려 결국은 치명적인 허위로 사람을 이끌기도 합니다. 사람을 세 차례 만나도 그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데, 사진과의 수 차례 조우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알려 줄 수 있을까요. 

"호리키는 얼굴색이 까무잡잡하고 단정하게 생겼는데, 미술학도치고는 드물게 깔끔한 양복 차림에다.. 머리에는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타서 착 넘겼습니다.(p52)" 포마드 운운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장이며, 사실 이런저런 문학 작품에는 미술가라고 해도 의외로 (판에 박힌) 폐인 광인 캐릭터보다 대기업 사원 같은 깔끔한 형이 자주 등장합니다. 요조는 어찌 보면 날카롭게 상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녀석은 분명 미술 솜씨도 신통치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참된 적성이 아니라 단지 열등감을 가리려는 위장막으로 전공이나 직업을 두르고 다니는 인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타고난 신분, 지위에 따라 주변에서 형성된 기대 같은 게 생기기도 합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담을 받기도 하고, 많은 경우 이것은 책임감으로 승화됩니다. 이 기대를 충족 못 시키고 책임을 수행하지 못한다... 인식이 이에 이르면 어떤 고귀한 종류의 정신을 지닌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에 사죄하고 자신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p80에서 요조가 하는 말을 눈여겨 보십시오. 

잡지사에서 온 듯한, 키가 크고 마른 여자(p101)가 호리키에게 작품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 짧은 장면에서 요조는 방에 하나만 놓인 방석이라는 미묘한 세팅(우연한 상황일 뿐이지만), 넙치에게서 온 전보(요즘 같으면 실시간 문자메세지) 등이 겹쳐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독자인 저는 여태 다양한 번역본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이 호리키의 엉터리 같은 내면, 한심하게 꼬인 두 사람의 관계 등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멋진 씬 같습니다. 

어떤 여성은 대개 특수한 관계의 남성에게 새로이 활력을 주고 정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제대로된 남자라면 그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합당한 사례를 하는 게 또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요조는 시즈코의 능숙한 솜씨에 오히려 역겨움(p107)을 느낍니다. 이게 (남한테 잘보여야 살아남는) 정부(情婦)의 특징일 뿐이다... 역시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요조의 사회 부적응은 부잣집 도련님 특유의 비현실적 몽상이나 도피성 심리에서 연유한 게 아니라, 오히려 꾸질꾸질 때 묻지 않은 안목에만 보이는, 비천한 타인들의 모순되고 타락한 약점을 향한 정확한 포착 능력 때문이라는 게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나는 여태 너처럼 포박당하는 치욕은 겪어 본 적이 없어(p130)." 호리키의 역습입니다. 여태 요조만 그런 스탠스였던 게 아니라, 오히려 호리키가 교묘하게 요조를 적당히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하게, 요조 특유의 자기 파괴 기제가 또 작동합니다. 그래, 나 같은 건 호리키에게 저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내로남불이며 자신과 똑같은 기준을 남에게 적용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공자 같은 인격자입니다. 자신이 가뜩이나 경멸하던 사람에게 역으로 경멸을 받으면 눈도 깜짝않는 게 보통 사람의 심리인데(반대로, 자신이 존경하던 이한테 그런 반응이 나오면 누구나 타격을 받죠), 요조는 반대입니다. "저런 녀석한테까지..." 답이 없는 고집이고 폐쇄성이지만 그게 또 요조만의 고결함입니다. 아무도 비난하거나 그를 교정할 수 없습니다.  

가독성이 좋고 역주가 많아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입니다. 박솔뫼 소설가의 추천사도 유익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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