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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복서
추종남 지음 / 북다 / 2023년 7월
평점 :
자신의 소중한 재능이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망칠 위기로 몰아넣는 건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의외로 역사나 문예 속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천재의 자기파괴적 패턴"이라 부르는데, 이런 천재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부여받은 재능에 따라 수행해야 할 그 숭고한 작업을 때로 무척 혐오하며, 다른 영역으로 도피하려 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 요나의 행동도, 어쩌면 그런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1960~70년대 슈퍼스타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일부 행적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팬이라면 스타의 소셜 미디어에 찾아가서 조회수 1,000 정도는 쉽게 늘려 줄 수도 있을까요? 음, 무례한 상대에게는 매너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태영의 말(p29)에 물론 수긍을 하지만, 폭력은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권숙의 태도도 유별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명인으로서 어느 정도까지는 감내해야 할 사항들도 있고, 저 "팬"은 어쨌든 자신이 좋아서 저런 경박스런 언행을 하는 건데 말입니다. 다만 권숙에게는, 그 영상을 보고 나타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 링 위에서 겪고 보이고 했던 여러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겠죠. 실제로 여성 복서들의 경우 아웃복싱 스타일을 잡는 게 얼굴을 맞지 않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소설에서 권숙에게는 그 이상의 더 심각한 사연 때문이지만.
"거만한 천재가 과연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는 소속사의 관리도 있고 미디어에서 저렇게 직설적이고 부정적인 헤드라인을 달지 않겠지만, 이권숙의 경우 워낙 대 언론 관계 설정을 엉망으로 해 왔을 테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무리도 아니겠습니다. "8살 때부터 내가 키운 권숙이는 약점이 없는 괴물이야.(p101)" 철용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권투 선수가 롱런을 하려면 맞지를 않아야 합니다. 타고난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전성기에는 거의 한 대도 안 맞고 선수 생활을 한 무하마드 알리는 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입니다.
아무래도 딸이다 보니 철용은 권숙에 대해 때로는 과민반응을 보여 가며 보호하려는 태도로 나옵니다. 태영은 물론 직업인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지만 아빠 눈에는 그 위험한 행동(의 전조)을, 제 이익을 위해 부추긴다며 태영을 아주 나쁘게 봅니다. 제대로 맞았으면 아마 뇌진탕으로 병원에 실려갔겠으나 태영도 대비는 제대로 해 두었습니다(p154). 한편 권숙은 ㅋ 엉뚱하게도 태영에게 (오해 때문에) 화를 내는데, 부친한테는 멱살 잡히고 딸한테는 배빵... 에이전트도 참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앞 p114에서는 권숙에게 정타를 맞아 기절까지 합니다.
"희원의 초라한 모습을 태영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p170)."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정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쟤를 따라가면 쟤뿐 아니라 나도 같이 무너진다, 누구 하나는 자리를 지켜서 나중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이기적인 것만 같아도, 나중에 보면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박 기자가 나타나 또 속을 긁는데... "참 수법이 안 변하시네요." "사람이 쉽게 변하면 어디 되겠습니까?" 뭐 그렇긴 합니다. ㅋㅋㅋ 사실 박 기자는 나쁜 놈이죠(p61).
권숙은 꼬박꼬박 태영에게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오빠라고는 절대 안 합니다(p116). 사실 태영도 나이가 있어서 누구한테 이자식저자식 소리나 듣고 멱살이나 잡힐 짬은 아닌데도 여기저기서 수모를 당하네요. 권숙은 그나마 개인종목이지만(물론 체육관 내 선후배 질서가 있긴 합니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라서 운동 외적인 게 사람 피곤하게 하죠. "재능 없는 운동 계속하기 싫어서 퇴부(退部)했어." 여기서 저 앞 p75, 이권숙 아니 이유리가 유치원 교사 그만두는 대목도 생각나더군요. "야 김희원이 뭐냐 김희원이. 김희원 선수라고 해야지." p209에서 태영이 언급하는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이고 그 설명대로 미셸 파이퍼가 여성주역 겸 주제가까지 다 불렀습니다. 김희원에 대해서는 저 앞 p40를 참조하십시오.
권숙은 최호중더러 "대표님은 왜 아저씨(김태영)한테 꼼짝못해요?"라고 묻습니다. 권숙은 아직 어려서 모르지만 사실 태영은 인간성도 진국이고 운동 보는 안목도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사실 호중은 선배라고 하면 일단 깍듯하게 굽니다. 때로는 비굴할 만큼... p313에서도 이철용에게 굽신거리는 걸 보고 권숙이 의아해하는데 그 와중에 애들이 와서 이모라고 하자 화를 냅니다. 태영한테는 막 부르더니 내로남불 쩐다고나 해야겠네요. 그래도 p67을 보면 에스토마타의 패배가 사실은 방심이 한몫 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등, 필요한 자기객관화는 철저하게 합니다.
길은 본인이 알아서 찾아야 진짜 자기 것이 된다는 태영의 말(p345)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권숙은 끝까지 태영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네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가정사나 그 외 사정 때문에 한때 좌절했던 여성 천재 복서가 다시 일어서는 얘기 자체가 재밌기도 하거니와 스포츠계 전반의 사정도 두루 짚고 인생사의 쓰디쓴 교훈도 전달하는 등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괜히 교보스토리 공모 최우수작이 아니네요. 곧 방송된다는 KBS 드라마도 기대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