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집 - 대한제국 마지막 황족의 비사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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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슬픔이란, 나라의 주인(과거 왕정 시대)인 임금과 그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나라님 하나만 의존하고 생업에 종사하던 수백만 백성, 생령들의 삶이 송두리째 곤두박질치는 날벼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망국의 경우 가장 극적으로 신분이 하락 강등하는 이들은 대개는 왕족, 왕실 사람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비극을 최전면에 내세우고 맥수지탄을 환유합니다. 이미 <덕혜옹주>로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권비영 작가님이, 다시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날들을 슬프게 이 신작 안에 형상화했습니다. 

이은은 영친왕으로 대중에 알려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며 순종(명성황후 소생)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 모후는 상궁 출신 엄귀비이며 이분은 현 숙명여대의 창립자 격인 인물이기도 합니다(p313도 참조). 영왕의 곁에는 마사코 여사가 머무르며, 이분은 자신이 남편인 영왕에게 더 극진한 대접을 베푸는 게 자존을 더 굳건히 지키는 길이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현명한 생각을 하십니다. "영친왕 이은은 조선으로 돌아가라!" 남의 나라를 도적질하고도 아직 성에 차지 않은지 사저에까지 몰려와 폭도 짓거리를 벌이는 못된 왜놈들의 행태(p82) 보십시오. 나라 잃은 이들이 겪는 부당함과 서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관동대진재를 구실로 미개한 왜놈들은 무고한 조선 사람들을 수없이 학살했습니다. 이은과 마사코 여사의 마음은 너무도 아팠으나 딱히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 이구(李玖)도 부모님의 괴로운 심경을 읽었는지 곁에서 쓸쓸하게 그들에게 무언의 위로를 보냅니다. 상하이와 홍콩을 경유하여 멀리 베네치아로 향하는 호화 여객선 하코네마루에 승선한 그들의 심사는 한없이 착잡합니다. 어린 구(玖)는 고모인 덕혜옹주의 당부, 그리고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우려 의거를 일으킨 여러 지사들의 행적을 조용히 떠올립니다. 

이등박문은 조선인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한편으로 더 악랄한 노선과 정책을 내세우려 했던 정한론자들과 정치적으로 적대했던 노회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퇴색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 자는 영친왕에게 겉으로 깎듯이 대했으나 그의 선의를 마냥 믿을 건 물론 아니었습니다. p136에는 이왕직 사무관이었던 고희경이 영친왕께 황태자의 본분을 결코 잊지 마시라는 충언을 올리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사실 이 사람은 정미칠적, 경술국적인 고영희의 아들입니다.  

"이 일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p165)" 일본이 패망하면 망국 황실의 적통 승계인과 그 식솔들에게는 잘된 일 아닐까 생각할 수 있으나, 소설에 잘 나오듯 간단치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일제는 조선 황실에서 나라를 강탈했던 악행을 덮기 위해 구 황족에게 일정한 우대를 했고 이 덕에 그들은 딱히 어떤 생업에 종사할 필요 없이 호화로운 생활이 가능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제가 망했으니 합방 상태도 해소되고 일본 황실 자체가 앞으로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는 판에 이은 일가가 보살핌을 받을 수는 전혀 없을 전망이었죠. 그렇다고 해방된 조국에서 왕실을 복벽시킨다는 보장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앞으로 어떤 적대적인 조치가 그들에게 내려질 지도 모를 판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p200에는 구황실재산처리법이 통과되어 이은 가족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영왕을 비난하고 적통이 의왕 이강에게 넘어가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사실 이강과 이은은 어머니가 서로 다르고 나이도 거의 부자지간처럼 차이가 납니다. 또 생전에 고종 황제는 명확한 의사로 후계자는 이은이라고 정한 바 있습니다. 아무튼 조국의 광복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불운과 불편의 물꼬가 열린 셈이 되었는데 소설 제목의 "잃어버린 집"은 일단은 이 뜻입니다. 

조선의 황태손이라는 고결한 신분인데도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줄리아(p221). 사실 저는 질척한 에로티시즘을 추구한 작가인 헨리 밀러를 좋아한다는 이구의 취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거기 동조라하는 줄리아도). 여튼 영왕의 건강은 날로 나빠지는데 여전히 마사코 여사는 그 품위를 지킵니다. 남편을 요셉이라 부르며 신의 가호를 청하는 이방자 여사. 소설 후반부는 며느리 율리아(이제는요)와 시모 마사코 여사 두 분의 의연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사연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품격은, 역경에 처해 봐야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하기 마련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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