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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품은 천리안 - 정경부인 장님 고성이씨
성지혜 지음 / 문이당 / 2023년 7월
평점 :
예로부터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고 자녀 교육을 훌륭히 시켜서 국가를 영도할 동량지재로 만드는 거록한 어머니들은 우리 역사에 아주 드물지는 않게 계셔 왔습니다. 한국 특유의,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라는 게,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면면히 이어져 왔고, 이것이 종종 기적을 일궈 냈던 것입니다. 실제로 명문가에서는 이런 훌륭한 부인들을 두고 그 일생을 현창하는 행장 같은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현재 가세가 크게 번창한 어느 달성 서씨 가문을, 결정적인 순간에 크게 일으킨 정경부인 고성 이씨를 주인공으로 삼은, 일종의 논픽션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추천사를 쓰신 서지문 고대 명예교수의 경우 바로 주인공인 고성 이씨 부인의 후손이며, 집안에서 이 여걸의 노고와 활약 덕분에 후손들의 이런 빛나는 현재가 있음을 누누이 교육 받고 자라나셨다고 회고합니다. 정경부인은 과거에 여성분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사실 "중시조"라는 건 한 성씨의 시조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부여되는, 후손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극상 단계의 숭앙 형태인데, 여성을 두고는 중시조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해당 대구 서씨 가문에서 이 부인의 위상이야말로 중시조의 그것에 버금가지 않을까 감히 가늠해 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고성 부인의 엄청난 활약과 덕망은, 제3자의 눈으로도 탁월하였습니다. 경남 고성은 타 지역 분들에게는 이름이 낯설 수 있으나 인구 대비 명문대 합격률이 엄청나게 높은, 수재의 본향으로 유명합니다. 고성 이씨 자체도 명문가로서의 족적이 고려시대까지 거술러올라가는 평판 높은 집안입니다. 이런 집안에서는 혼사를 올릴 때도 가격(家格)이 맞는 상대끼리 사돈 관계를 맺지 않겠습니까.
제비집이 약초로 쓰이는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잘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여러 경우에 특효를 낸다고 들어서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p75에 보면 이 제비집의 경우 특별한 귀품이며 황제에게도 바친 진상품이라는 서술이 있습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아가씨 경이 눈이 안 보여 고생하는 대목은, 아직 이분이 어린 나이이기에 (이후 성장하여 어떤 위인이 되시고 안 되시고에 무관하게) 독자로부터 큰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의원의 말씀 중에 소심 공포증이라는 진단이 있는데 요즘은 이 말을 쓰는 분이 좀 드물어진 듯도 합니다. 확실히 어휘라는 게 특정 세대 특정 지역에서 유독 선호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앞에서 명나라 황제가 언급이 되었는데 명종 연간에 경술년이라고 하면 1550년입니다. 이때 재위한 명의 황제가 경태제(景泰帝)이며 묘호가 세종(世宗)입니다. 그러니 p90에서 작가님이 세종이라고 하신 게 정확하며 이처럼 디테일에서까지 정확하기 때문에 제가 논픽션에 가깝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이고는 벗 이황(경칭은 생략하겠습니다)을 찾아나서는데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아는 퇴계 이황(당시 풍기 군수)입니다. 여기서 퇴계께서 하시는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부부란, 서로의 장점은 북돋우고 단점은 채우며..."
신랑이신 서해님의 마음씀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신부 이경이 앞을 못 본다는 것을 알고도 저처럼 의연히 신부로 맞아들이며, 형 서엄의 분노까지 진정시킵니다. 자태도 아름답거니와 천품이 뛰어난 신부에게 이미 무한 신뢰를 보내는 건데 의젓하고 훤칠한 용모에 과연 그에 어울리는 인격까지 갖춘 젊은이입니다. "심지가 굳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소실을 들일 생각도 없다 하시는데, 이미 가친께서 색을 찾으셨던 통에 가족들이 혼이 난 적 있어서라고 합니다.
확실히 과거에는 남성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온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잦았나 봅니다. p142를 보면 고성 이씨 가문 어느 분 때문에 집안 전체가 망신을 당하고, 이경은 시각장애인인 것 외에도 정말로 앞이 캄캄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p147에 보면 당대 일류 선비들이 성리학의 주제를 두고 고담준론을 펼치는 장면이 있는데 학봉 김성일, 내암 정인홍 같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 와중에도 서해와 이경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가이없습니다. 이경은 장애인이라서 힘들겠으나 비유적 의미에서 거안제미의 고사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물태위선, 적덕지가필유여경(p231), 이런 말을 몸소 실천하여 지아비와 후손 모두를 입신양명의 길로 등어서게 도운 분이 바로 정경부인 이경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남은 페이지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곁다리로 전개되는 기오랑과 동이의 사연도 재미있었습니다. 성지혜 작가님의 전작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단편집)>, <사랑의 묘약> 등은 아주 모던한 분위기였는데 이 장편은 갑자기 배경이 조선 중기라서 약간 당황했었으나 나중에는 빨려들어가듯 읽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