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수상록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10
미셸 드 몽테뉴 지음, 구영옥 옮김 / 미래와사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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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실제 역사의 사례에서 인간 행동의 여러 동기를 추출하고, 특히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사람의 확고한 결의, 고집 등이 바뀌는 과정에 주목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하여,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마저 버리고 약자의 수치를 뒤집어쓴 채 애걸복걸한다... 많은 경우 우리들은 "저 치도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모욕을 줄 필요가 있나." 같은 생각(연민, 동정심) 때문에 강압 행위를 중단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본 p8~9에 등장하는 웨일즈 공 에드워드(곧 우리가 아는 그 흑태자입니다)는 리무쟁(리무진의 어원)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그대로 종전의 분노를 퍼부으려 들었습니다. 이걸 멈춘 건 프랑스의 용기 있는 세 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의 열세상에 구애 받지 않고 감연히 흑태자의 폭력적 처사에 맞섰습니다. 흑태자는 돌연 존경심이 들어(즉, 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덕목을 지닌 이들이라는 자각) 무력 행사를 중단했다는 게 몽테뉴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조의 고결한 혈통을 받은 자만이 특별한 회심의 기제를 갖는다는 식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애들도, 주먹다짐을 벌이다가 상대가 만만치 않으면 씩 웃으면서 한 발 빼기 마련입니다. 흑태자라고 뭐가 달랐겠습니까? 게다가 이 사람의 역사 속 행각을 보면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유형입니다. 이런 난폭하고 무자비한 사람의 동기에 과연 기사도나 품격 있는 정신적 작용이 실재했을지가 오히려 의심스럽습니다. 

계몽사상가로서의 몽테뉴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건 제 생각에는 p41부터입니다. 어떤 특정한 신성한 물건으로부터 신체적 고통이 완화된다는 건 아주 어리석은 미신이라서, 21세기라면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6세기 프랑스에서는 배울 만큼 배웠을 귀족들이라 해도 이런 미신을 따랐나 봅니다. 몽테뉴는 이런 풍조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논조를 취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몽테뉴가 이 화제를 꺼낸 이유는 "미신 타파"에 있다기보다, 인간이 머리로는 이게 정답임을 뻔히 알면서, 감정을 미처 거르지 못하고 어떤 결정이나 반응을 보이는 게 보통임을 지적하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스토아 학파가 지중해 세계에 출현하여 많은 식자층과 귀족을 사로잡은 건 몽테뉴의 시대로부터 거의 천 년 전 일입니다. 몽테뉴는 p96 이하에서 참된 우정에 대해 길게 논하는데, 왜 이 책, 특히 그 제목이 중수필(重隨筆)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논하는 주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곤 하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치는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반면 책의 내용에서 몽테뉴 개인의 신변잡기 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중수필의 본령입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글을 보면 어느 농민의 어린 아들이 "내가 괜히 남자로 태어나 부모께 군역의 부담(군포 납부)만 안긴다"며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절단했다는 이른바 애절양(哀絶陽)의 기록이 나옵니다. 이 책 p196에 나온 근세 프랑스의 이야기 둘은 소재가 비슷하면서도 저것과는 사뭇 결이 다른데, 한 농민은 아내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아내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남성의 심볼을 스스로 낫으로 쳐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까지에서는 마치 혜가가 달마 대사에게 자신의 팔을 잘라 던져 가르침을 구했다는 불교 설화라든가 크로노스에게 생식기를 잘린 우라노스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했으나... 

또 어느 신사는 평소부터 연모하던 숙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여 마침내 합방의 기회를 잡았는데, 막상 거사를 행하려니 갑자기 그 양물이 말이 안 들어 결국 방사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 다음이 걸작인데, 신사는 그 숙녀에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뜻으로 문제의 부위를 잘라서는, 함에 넣어 수치를 씻는 제물조로 헌납했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런 이야기들(두 사례 모두, 은근 저자가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해당 남성들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인 듯합니다)이 몽테뉴의 고전에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명저라는 건 우리 독자들이 직접 두 눈으로 읽어 본 후에야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읽고 나서 너무도 아픈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카고플랜의 고전들은 언제나처럼,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쉽게쉽게 읽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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