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예언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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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컨대 난 자네를 죽이지 않았어(p86)." 하지만 문제가 전생과 후생에까지 이어진다면, 분명 나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자 내 영혼의 벡터가 책임질 일이라 해도 어찌 기억이 그에 미치겠습니까. 학장님 같은 석학이라 해도 이는 장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p156에서 그는 클로틸데가 바로 자신임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요즘은 문명 시민들의 안온한 삶이 내내 보호받는다는 어떤 낙관, 기대를 가지기 힘든 세상입니다. 아니, 프랑스만 해도 최근 몇 년 새 얼마나 잦은 테러를 겪었습니까. 그런데도 의연한 시민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고 평화로운 태도를 보입니다(p89). 너희 테러리스트들은 결코 너희들의 사악한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선량한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보여 줍니다. 정의로움, 혹은 인류 문명의 올바른 진전은 어떠한 방해 기도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는 <므네모스>라고 해서 역사상의 중요 사건들이 챕터 사이사이마다 소개됩니다. 아, 이 소설처럼, 우리네 역사의 미래 귀결이 마치 책처럼 열람, 검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이 답답해진 마음이 후련해지겠습니까? 그러나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채로 우리 앞에 남아 있고, 심지어 과거 역시 막연한 기록 속에 파편적으로 남았을 뿐이라 우리는 추론의 영역에 의존해야 합니다. 이 와중에도 멜리사는 특유의 시크하고 냉소적인 기질(p160)을 과시하며 일행의 모험에 어떤 양념을 더합니다. 분단 도시, 분단 도시... 이곳은 키프로스의 니코시아이며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날카로운 이해가 대립하는 현장입니다. 

단장은 말합니다. "난 살뱅의 예언서가 큰 강점을 하나 가졌다고 생각하오.(p38)" 이 예언서는 가스파르의 것과 달리 2053년까지 다루기 때문이랍니다. 미래에의 예언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힘에 간혹은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살뱅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인류는 삼 보 전진한 후 반드시 이 보 후퇴합니다." 이 역시 인류사를 오래 천착한 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임에 틀림 없습니다. 삼 보 전진도 의미 있지만, 이 보 후퇴 역시 그 국면에 하필 던져진 이들에게는 너무도 아픈 법칙이 아니겠습니까.    

현대 범죄 수사에도 최면 기법은 일부 활용됩니다(증거능력 여부는 별개지만). p131에서 퇴행 최면 밑에 깔린 논리가 과학적이라는 확신은 자신에게 없다고 멜리사는 내뱉듯이 말합니다. 확신이 없어서 최면이 잘 안 되는 건지, (어떤 이유에서건) 최면이 안 되니까 확신이 안 간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윤리 규범이 독일 기사단보다는 성전 기사단에 가깝기 때문이야.(p144)" 클로틸데가 말합니다. 자신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선언하며 말입니다. 

후... 그리고 꿀벌.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문명의 존부와 꿀벌의 멸종 사이에 놓인 인과관계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p220 이하에서 오델리아는 청중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발표합니다. 여왕 꿀벌이 현재 ooo 상태에 놓였고, 어떻게 해서 이 작은 곤충 한 마리에 인류의 운명이 알렸는지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녀의 태도에 우리 독자도 압도당하는 듯합니다(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라 생략). 

생명의 존엄함은 우리 인간과 자연, 갖은 생명들이 인과 연에 얽혀 하나의 공동 운명체를 이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우리가 전생에 지은 업이 지금, 또는 내생에까지 질긴 연의 고리로 묶였다면? 세상사 심오한 이치 앞에 무지한 인간은 더욱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르베르 특유의 선한 평화주의와 초월적 세계관이 재미나게 녹아든 소설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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