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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군주와 신하의 소통 방식 - 숙종 비망기와 박세채 사직소
김백철 지음 / 그물 / 2023년 3월
평점 :
46주차에 이미 <관세율표> 서평을 올렸으나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다른 책을 읽고 서평 하나를 더 등록합니다. 일단 책프는 1주마다 책 한 권을 읽는 게 원칙인데, 여러 주에 걸쳐 읽은 책을 마지막주에 마무리짓고 올리는 건 약간 규정 위반 소지가 있지 않나 하는 자체 판단이 들어서였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책의 분량은 방대한데 서평 길이가 좀 짧았습니다. 물론 책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뭘 더 쓴다고 해도) 내용 요약 외에는 쓸 말이 없긴 한데, 여튼 서평에 개인 감상이 좀 많이 들어갈 여지 있는 책을 애초에 골랐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계 박세채는 숙종 연간을 다룬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서 당대 소론의 영수격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이분 하면 떠오르는 분이 배우 박종관씨인데 드라마 <인현왕후>에서 이분 역을 맡아 연기했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숙종 대에 세 번의 환국이 있었고 최종 승자는 서인이었는데 그 중에서 소론은 마이너리티였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그 나름 고른 등용을 한답시고(이미 죄[?]를 짓고 내쳐진 남인은 제외하고) 소론 중에서 저들 박세채와 남구만을 쓴 건데(p81을 보면 탕평의 의리주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탕평 자체는 일반명사로서 어느 시대에나 쓰던 말입니다) 두 분이 나이로도 비슷한 또래입니다(조선 시대 양반끼리의 교분에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지만). 저 사극에서 남구만 역은 한인수씨가 연기했는데 한인수씨와 박종관씨도 비슷한 또래입니다.
p44에 보면 "다리와 팔"이란 말이 나오는데 고굉지신은 실제 당대에도 쓴 말이고 역사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저자는 성종이 훈신세력(=훈구파)과 신진관료 사림을 균형 있게 대우하여 결과적으로 그 연간에 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숙종 대보다 한참 전이죠. 이 두 시기가 얼마나 서로 떨어졌냐면,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시작된 게 숙종 연간입니다. 반면 성종은 고작, 세조의 손자입니다. 조선 전기 내내 사육신은 복권의 복 자도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습니다). 임금의 기량 차이가 확실히 나서인지 연산군 대에만 사화가 두 번 일어나고 그럼(공신 세력을 대거 보강)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가 일어났죠.
p56을 보면 저자는 3차 예송을 따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아는 2차에 걸쳐 일어난 예송은 모두 현종 대에 일어났고 이 3차 예송은 현종 본인의 상(喪)을 계기로 발생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1차 예송은 서인 승, 2차는 남인 승이었는데 3차 예송은 결국 윤휴의 의견이 채택되어 다시 남인이 이긴 셈이니 말입니다. 이러니 왜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그런 대규모의 물갈이가 이뤄졌어야 했는지 짐작이 되죠. 허견 같은 문제 많은 인물이 설칠 만큼 숙종 초기에는 남인들이 득세했던 것입니다. 薨逝(훙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왕이 죽으면 승하, 붕어 같은 말도 쓰죠. 사극을 보면 이 말을 간혹 "흉서"라고 발음하던데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뜻이 완전히 다른 뜻이 되고 엄청난 불충(?)이겠습니다.
이 책에는 좋은 분석이 참 많은데 예를 들어 p94를 보면 숙종이 군주 위상을 재정립하려 애썼다고 합니다. 유학에서는 치통(治統)과 도통(道統)을 전통적으로 분리해 왔는데, 각각 왕통과 학통으로 바꿔 써도 되겠습니다. 사실 이슬람에서도 술탄이 있고 칼리프가 따로 있는 게 원칙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았죠. 제정일치와 제정분리의 딜레마라고 할까. 또 서유럽도 내내 교황과 황제가 분립하는 걸 원칙으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황제가 교황보다 우위인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여튼,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숙종이 학문과 인륜의 수호자 역할까지 이제 자처하고 나섰다는 점입니다. 치통과 도통의 일원화이겠습니다. 한참 뒤 정조가 이른바 문체반정을 주도한 것도 크게 보면 이의 연장선상입니다.
p115를 보면 특히 이 시기 국왕의 비망기(備忘記)에는 그런 특별한 의의가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상기합니다(비망기에 대해서는 이미 p18에서 개념 정리가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숙종 연간 환국을 세 차례로 꼽는데 이 책에서는 갑인예송을 갑인환국으로도 파악하여 모두 네 차례 환국을 규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갑인-경신, 경신-기사 사이에 간격도 적절히 맞아떨어지고 경신대출척의 의의도 정확히 잡힙니다.
이 책의 본주제인 박세채 상소는 제3장부터 자세히 다뤄집니다. 신하가 올리는 상소에는 제왕이 비답을 내리는 게 원칙이며 그래서 소통이라고 제목이 붙었겠으나 사실상 박세채의 화려한 문장, 심원한 학식, 정견 등이 메인인 원맨 리사이틀에 가깝습니다. 예전 문장을 보면 군왕에 대한 예의, 상소문의 전통 격식 같은 게 있어서 그 요지가 뭔지 현대인은 한눈에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는 서양 문학도 마찬가지라서 무려 19세기에 나온 루 월러스 장군의 <벤허>만 봐도 아직 성경 인용 군더더기(?)가 참 많습니다. p182에 저자가 그 구조를 표로 잘 요약해 둔 게 있습니다.
출처를 일일이 각주로 다 처리했고 권말에는 용어 색인까지 있어서 비록 분량은 많지 않으나 대중서라기보다 학술서적이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