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마니아 - 미완의 혁명
스티븐 로퍼 지음, 허창배.최진우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27기 19주차에 문학사상 1986년 3월호를 리뷰하며 게오르기우 신부 인터뷰 기사를 언급했었습니다. 루마니아는 2차 대전 후 비록 공산권에 편입되었으나 (이 책에 나오듯) 그전부터 코민테른 측과 갈등이 잦았고, 1980년대 차우셰스쿠 독재가 지속될 때에도 소련 측과 이상하게 대립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는 중국, 유고와 함께 공산권 단일대오를 이탈하여 참가했습니다. 유고는 2차 대전 직후부터 스탈린과 사이가 나빠서 대립했고, 이후에는 비동맹진영에 가담하였습니다. 중국은 1960년대부터 소련과 이른바 3대 분쟁을 일으켜 역시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런데 루마니아가 공산주의 종주국과 사이가 틀어진 건 저들 두 나라와는 궤가 다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20년대부터 이상할 만큼 마오를 견제하며 우파 장제스를 엉뚱하게도 지원했고, 중국 공산당이 농민을 혁명 주도 세력으로 이론화하고 나섰을 때 아주 불쾌해하며 이를 저지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본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게 맞고, 체질적으로 보수적인 농민들은 오히려 반동 측에 가담하는 게 보통입니다. 스탈린이 잔혹할 만큼 집단농장화를 밀어붙일 때 농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한 역사도 있으니 마오가 이런 이론화를 시도할 때 여러 모로 심기가 붕편했을 뿐 아니라 잘못하면 체제의 정당성에까지 금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마오는 어디까지나 자국 혁명 과정에서 농민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었고,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으로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공식대로라면 대체 어느 세월에 정석대로 혁명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아예 자국 혁명 자체가 이류라거나 사이비로 부정당할 위험마저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마니아 역시 공업이 발달하지 못했었고 2차 대전 전까지 농업인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1949년 소련은 코메콘을 출범시켰는데 이건 공산권 내 경제상호원조회의를 뜻합니다. 이거하고 헷갈리면 안 되는 게 코콤인데, 이건 미국이 주도한 대(對)공산권 수출 통제위원회를 가리킵니다. 여튼 이 코콤은 세 그룹으로 갈리는데 첫째 동독,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꽤 발전한 공업국, 둘째 폴란드와 헝가리처럼 적절하게 발전한 나라, 셋째 루마니아, 불가리아처럼 매우 발전이 더딘 나라(이 책 p71). 루마니아는 불가리아 따위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게 싫어 최종 서명을 계속 거절했었습니다. 이런 진통 끝에 루마니아는 더 많은 발언권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거쳐, 루마니아 공산당은 내국인의 단결과 충성은 물론 해외로부터의 주목까지 동시에 획득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는데 헝가리 사태 때 WTO의 명령, 사실상 소련의 지시를 거부하고 헝가리에 진압 병력을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끝내 소련은 이런 뻣뻣한 차우셰스쿠 서기장의 고개를 굽히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등 자본주의 진영은 차우셰스쿠의 강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차우셰스쿠 서기장은 개인 권력 강화, 자기 숭배에만 모두 돌려 국력 증진에 돌려 쓰지 못한 게 큰 실책이었습니다.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월드스타가 되었고 1984년 올림픽에서는 루마니아 선수들이 체조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통에 종합메달 순위 2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병적이라 할 만큼 집요했던 개인숭배, 그리고 부정부패 때문에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는 점점 임계점을 향해 치솟았고 급기야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 부부는 권좌에서 쫓겨난 후 잔혹하게 처형당합니다. 희한하게도 주류 공산진영과 항상 거리를 두고 정치를 했던 그가, 막상 공산권 붕괴 단계에서는 남들이 알아서 물러날 때 혼자 버티다가 마치 공산주의를 대표해서 처단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게 역설적입니다. 세계는 당시 분연히 일어서서 독재자를 쫓아낸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무렵 한국의 어떤 분도 권좌에서 막 물러났을 때라 저걸 보며 남일 같지 않아 조마조마했지 싶습니다.
과연 1989 루마니아 혁명은 혁명이 맞는가? 미완의 혁명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현재 루마니아는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도 이승만 정권이 학생들과 시민의 힘으로 무너졌지만 여러 이유로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 불렀습니다. 헝가리도 가장 먼저 시장경제로 이행한 구 공산권 국가이었지만 지금은 EU 안의 이단아로서 여간 애를 먹이는 게 아닙니다. 어제 승리를 확정짓고 종신집권의 길을 연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은 또 어떻습니까. 루마니아는 전통적인 민족주의, 극우 포퓰리즘, 혹은 서유럽화 등 여러 흐름 사이에서 어떤 균형추를 잡을지 이 책을 읽고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네요. 물론 정확한 귀착점의 계산이야 신의 몫이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