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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시민불복종 ㅣ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8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황선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3년 5월
평점 :
시민불복종이란 개념은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전에도 있었고 그 연원이 짧다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 9차 개정 현행 헌법에도 한때 저항권을 넣자는 말이 있었으나 헌법 전문의 "불의에 항거한 4.19 정신...." 구절의 존치 정도에서 그쳤고, 다만 전문도 엄연히 헌법의 일부이므로 규범력을 발휘한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향후 이뤄질 10차 개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규정도 삽입되리라는 전망이 또한 대세입니다. 이처럼 시민 불복종은 한국인들에게도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라 하겠고, 우리에게는 <월든> 등으로 잘 알려진 19세기 미국의 자연친화적 철학자 소로가 유려하고 준엄한 필치로 남긴 이 "불복종론"이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지 탐독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단 한 순간이라도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정부를 내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p12)" 이 문장을 보면 우리는 소로가 얼마나 예전 사람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죠. 소로의 활동 시기에는 미국에서 엄연히 노예제가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버젓이 (비록 일부에서라고 하나) 가동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소로의 위대함은, 노예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에 (노예 소유주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른 주장을 저렇게 거침없이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해방된 후에야 누가 항일운동을 못하겠습니까.
소로는 그 철학적 주장도 진정성과 심오함을 동시에 갖추었지만 문장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고전 명작으로부터의 적절한 인용도 무척 많은데 예를 들어 이 책 p15 같은 곳을 보면 시릴 터너의 희곡 <복수자의 비극>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권력과 금력 앞에 고개를 숙이는 정부(政府)를 매춘부(賣春婦)에 비유합니다. 시릴 터너는 소로의 시대로부터 3백년 전 사람인데(이름만 보면 여자 같지만 남자입니다), 소로는 이 대목에서 한 세대 위 영국 신학자인 윌리엄 페일리를 비판하면서 터너(=투어너)를 인용했습니다.
즉, 시민은 어디까지나 실용적 관점에서 더 많은 편익이 있기에 정부에 조건부로 "복종"하는 것이라는 게 페일리의 주장인데, 이조차도 보수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논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로는 저런 페일리의 주장에 대해서마저 통박합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이행하고 지켜야 할 의무 앞에서 대체 이익과 비용의 경중을 따지는 게 무슨 짓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노예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하며 행여 실정법과 정부가 이를 지지한다면 그런 악법과 시스템에는 시민들이 복종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당장이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이의 폐지와 전복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로는 이런 말도 합니다. "불의를 근절하는 데 전념하는 게 모든 시민의 의무는 아니다." 심지어는 이렇게도 말을 이어가네요. "심지어, 그것이 엄청난 불의라고 해도 말이다." 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그도 미국인이긴 한가 봅니다. 영미인들이야 항상 "Mind your own businesses" 모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의미심장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적어도 불의를 몸소 행하지는 않아야 한다. 또, 불의한 정부를 지지하는 건 바로 불의를 행함이나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소로 특유의 시민 불복종 신조가 가장 간명하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인간 양심의 목소리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카이사르의 것과 신의 것을 구분하라"고 했습니다. 소로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시민들에게 "당신들이 풍요롭게 사는 게 누군가의 정당한 권익을 희생한 바탕 위에서는 아닌지 돌아보라"는 취지에서입니다. 재미있게도 소로는 공자의 말까지 인용하는데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가난이 부끄러운 일이나, 불의한 세상이라면 부귀가 부끄러운 일이다"입니다. 아마 이 말이 소로의 마음에 꼭 와 닿았을 듯합니다. 이 말은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데,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해석하면 "나라에 도가 있다면 (벼슬하여) 녹을 받되,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을 받으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란 뜻이 됩니다. 소로는 이 문장을, 특유의 칸트주의를 대입하여 자기만의 색깔로 재해석하네요.
언제나처럼 시카고플랜의 쉬운 번역은 독자를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