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뎐 상·하 세트 - 전2권 구미호뎐
한우리 지음 / 너와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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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면에서, 과거에나 지금이나 우월하긴 했지만 이연은 이복동생 이랑을 너무 무시합니다. 하긴 이랑뿐 아니라 누구라도 무시하고 드는, 재수없는 이연이긴 합니다만, 본마음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태도나 말이 좀 과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러니까 원래 안 그럴 사람도 더 엇나가고 더 비뚤어지고 흑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비뚤어진 이복동생 캐릭터(요사스럽기까지 한)는 김범보다 더 잘 표현할 배우가 과연 있을까 싶을 만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립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p39를 보면 이랑이, 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매번 그렇게 당해 왔으면서도 또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본집은 "처음 만난 그날처럼 '형'을 찾아서"라며 이 장면에서 김... 아니 이랑의 심리를 지문으로 자세히 표현(지시)하는데 특히 저는 형이라는 단어에 작은따옴표까지 표시된 게 눈에 띄었습니다. 이래서 대본(집)은 그저 기술적인 문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 작품이라는 거죠.  

p62를 보면 캐릭터 구미호(이연)가 캐릭터 어둑시니를 신랄하게 조롱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두억시니)를 위한 동화 같은 건 없는 거야." 도깨비나, 이름이 비슷한 두억시니가 비중이 큰 동화, 민담은 있어도 어둑시니가 독자한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런 건 확실히 없긴 하죠. 구미호가 목에 힘 줄 만하고 어둑시니가 야코 죽을 만한 포인트입니다. 

산신도 누가 그를 지켜 줄 필요가 있을까요? 여자가 남자가 귀엽다는 느낌이 들 때, 혹은 이 남자를 내가 지켜 줘야겠다 싶을 때 게임은 끝났다고들 하죠. 아음은 p71에서 이연에 대해 그런 감정을 표현합니다. 물론 현대의 남지아는 그런 전생의 사정에 대해 까맣게 모르니 이연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겠습니까. 

이 사장이라는 캐릭터도 진짜 웃깁니다. 이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가, 조연 단역들조차 조용히 묻히는 법이 없고,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드립을 치건 깝죽거리건 간에 시청자들을 쉬지 않고 웃겨 준다는 점입니다. p87에서, 예의 그 이무기를 섬기는 사장이, 불과 얼마 전에 이연을 사지로 몰아놓고는 마치 큰 생각이나 해 주는 양 이연 앞에서 너스레를 떠는데 드라마를 본 독자라면 그 장면이 선하게 생각나면서 웃음이 머금어질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소소한 빌런들도 이처럼 매력들이 있어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p126에서 이무기와 이연이 대치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대본집에서나 중대한 고비 노릇을 합니다. "네 자리의 주인은 나였어. 용이 되어 승천하는 순간 인간의 눈에 띄지만 않았다면..." 이무기는 우리 전래 설화에서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뭔가 한 끗이 부족해서 지존의 위상을 놓친, 민중의 동정과 응원을 은근 받는 안타까운 존재인 게 보통이죠. 그런데... 여기서도 어둑시니는 두 번 울게 된다는 게... ㅠ 

p183에서 이연은 그 지친 몸을, 기유리가 운전하는 차 안에 누입니다. 기유리 캐릭터를 연기한 김용지 배우가 정말 독특한 비주얼이라서 극중 러시아 구미호라는 설정이 아주 찰떡이죠. 이 드라마에서 정말 감탄이 나오는 건 저 기유리 캐릭터에도 현생에서만 재미있는 사연을 부여한 게 아니라, 전생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배경 사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네 삶이, 적과 친구로 딱 나눠 떨어지는 관계란 극히 적고, 때로는 믿고 의지하다가 때로는 미칠 듯 증오하는 식으로 꼬이는 게, 아 전생에서부터 업과 연이 다방면으로 얽혀서 그렇다고 하면 뭔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이 드라마가, 그냥 단순하게 트렌디 드라마로만 보면 한없이 단순한 재미도 있지만, 뭔가 해석을 좀 하려고 들면 단단히 심오해진다는 게 저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겁니다.    

p248을 보면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완전히 알게 된 남지아에게 이연이 제의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이 현세에서 흔하게 보는 그냥 보통 부부라고 치자는 거죠. 어디 그게 되겠습니까. 천 수 백년 동안 얽히고설킨 연이, 카르마가, 시퍼렇게 도사리는데, 그게 당사자끼리 말 몇 마디로 퉁치자고 해결이 될 일입니까. 둘 다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평범한 부부들의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힘들다는 걸 알기에 저렇게 애처롭게 설정극을, 롤 플레잉을 하는 것입니다. 

데드엔드. 막다른 길. 우리 내면엔 알고 보면 너무도 많은 내가 있어서 과연 누가 진정한 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지아 즉 이아음 공주님만 재수 없게 그렇게 되신 게 아니라(물론 이분은 특별한 사정이 있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평범한 우리들도 다 하이드 한 마리를 속에 키우고 삽니다. 막다른 지점에 이르면 이 둘이 결전을 벌입니다. 이연한테도 아니고 절대 선 절대 미의 화신인데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아음에다가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박아 넣었다는 게 드라마에서 진심 탁월한 점입니다. 

p314에서 참 지아와 이무기 지아의 대면 씬은 정말 명장면입니다. "미친 년, 껍데기 주제에 감히 날 오라가라 해?" 여기서 밀리면 빼박 나는 껍데기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 장면에서 지아는 정말 당당합니다. 이연에 대한 폄하도 서슴지 않으면서 이무기의 가장 아픈 상처를 치고들어갑니다. 자기 스탠스를 전혀 양보 않고 할 말 다 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강한 가공할 적수에게 맞서는 모습이야말로 진정 공주님의 위엄이자 품위, 기상입니다. 

p366에서 이연의 대사가 또 재미있는데 동생 이랑을 향해 "조커 뺨치는 얼굴로 설치고 다닌다"고 딜을 넣는 장면입니다. 조커 뺨치는 얼굴이라! 좀 그렇기도 하죠. 이 캐릭터들은 동서양을 초월하여 같은 급들끼리 교류가 있나 봅니다. 산신님이 저 바다 건너 고담 시티의 명물하고도 아는 사이라는 게... 생각해 보면 뭐 당연하기도 합니다.  

산신, 혹은 이승 저승의 그 누구라도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 법칙들 위에 "그대라는 운명"이 위치할 수도 있겠고 말입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는 츤데레 아닌 존재가 없다시피한데, oo를 제대로 죽여서 (일단은) ooo를 무기력하게 만들라는 노파의 말에 이연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대본집 p383에 아예 대놓고 지문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이연의 마음 안에 들어가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연은 노파더러 원래 그럴 줄 알았다며 신뢰를 표시합니다. 알고 보니 매트릭스의 오라클이었네요?ㅋ 

어둑시니가 영원히 질투하는 우렁각시네 한식당에서 신주-유리 커플이 회포를 풉니다. 바로 앞에서 현의옹과 노파 커플도 닭살돋는 금슬을 과시했습니다. 이제 지아는 그 엄청난 소동을 치러 낸 수고와 보람을 직업에서 승화시키기 위해 <구미호뎐>을 완성하고, 마침내 되찾은 부모님과 함께 행복한 생일상을 맞습니다. p441에서 "길은 네 스스로 만든 거다."라는 노파의 이연을 향한 대사가 묵직합니다. 매번 파격을 일삼았으나 정도(正道)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이연. 진정 세상사에 통달한 구미호의 재주인데, 우리네 삶도 이와 같아서 정말 약은 사람은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룰을 다 지켜 가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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