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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일기 1 - 수박 서리
한즈 지음 / 좋은땅 / 2023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품고 삽니다. 그 추억 중에는 자랑스럽거나 마냥 행복한 것도 있고, 약간은 부끄럽거나 남우세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계가 존재해서, 찜찜하거나 떳떳지 못한 행동과 기억을 비밀리에 공유하기도 하고,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리와 정의감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 작고 귀여운 소설에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마음 한편에 숨겨 놓았을 만한 기발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비슷한 체험이 있었는데, 꼭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 접근해서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사람을 홀리려드는 덩치 큰 이상한 형이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습니다. 이게 참 우스운 게 애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줄은 다 아는데, 막 잘해 주면서 조금씩 마음을 사려 들면 애들이라서인지 막판에는 꼭 넘어가고 만다는 점입니다. "애들은 조금만 잘해 주면 깜빡 넘어온다." 참 개탄스럽지만 고금을 불문하고 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p45에서 "그 형"은 호박 변신술이란 걸 가르쳐 준다며 "나"에게 접근해 옵니다. 얼마나 뺨이 얼얼했을지 안 겪어 봐도 짐작이 갑니다. 자신도 어린이이면서 동생뻘한테 그런 어처구니없는 마법(?)을 가르쳐 준답시고 수작을 건 걸 보면 어른이 볼 때 참 황당하기만 합니다. 대체 이런 애들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요?(물론 소설을 계속 읽어 보면 짐작은 됩니다) 저 뒤 p140을 보면 이 놀라운 마법의 효과(!)가 나옵니다.
또 아이들 때에는 대개 일찍 자는 게 보통인데(어른의 지도에 따르건, 그냥 피곤해서건 간에), p51을 보면 "내 의지로 그렇게까지 오래 깨어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애들 때에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것이라서 두근두근합니다. 하필이면 다른 서리꾼들까지 끼어들었는지 (p160을 보면) 호루라기 소리에, 뭐 또 어른들 고함 소리에, 아주 밤이 떠나갈 듯합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그날밤입니다.
수박 서리는 대개 먼 동네로 원정을 간다고 합니다(p86). 뭐 실제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긴 합니다만 아무려면 같은 동네 아저씨 물건을 훔치거나 할 수는 없겠죠. 멀리서 뭘 훔쳐도 훔쳐야 추적도 피할 수 있고 아는 사람한테 피해를 끼친다는 죄책감도 조금은 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도둑질은 도둑질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내애들끼리만 있을 때, 남들한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짓을 대담하게 저지르고 자신들끼리만의 비밀로 간직하는 걸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기는, 경우에 따라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는 관행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그런 미개한 분위기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귀신이 무서운걸까?(p94)" 당연합니다. 죄의식, 죄책감이라는 건 인간인 이상 그 마음에 담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신, 도깨비, 나아가 신 같은 것도, 뭔가 양심이 불편했던 인간의 집단 심리가 빚어낸 피조물입니다. p94에서 다친 발톱이 p113에서도 내내 아픈 주인공. 사실 발톱이 저렇게 아프려면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고서는 저런 일을 안 겪습니다. 진짜 아픈 건 발톱이 아니라 양심이 아니었을지.
아까 그 물귀신인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느닷 등장한 구미호, 저렇게 예쁜 구미호라면 설령 그 결말을 뻔히 알더라도 거부할 수 없다(p194)는 걸, (팬티를 안 입은 상태인) 주인공은 그때 이미 알았다고 합니다. 사막의 여왕이나 세이레네스 같은 치명적 몸짓에 수컷이 굴복하고 마는 것도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전학이란 그저 유년시절에 겪는 한두 번의 도전에 불과한데 무슨 좀비부터 구미호까지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참 별 일을 다 겪습니다. 그래도 좋으니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