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의 밤
이연주 지음 / 문이당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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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누구나 다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농사만 지어서는 끼니도 제때 챙기기 힘들었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는 건 특권층에게나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에는 보통 공부 잘하는 아들 한 명이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4년제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취직이나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지원을 받곤 했으나 이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하죠. 교직은 저 당시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에게 매우 선호되는 직업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 엄한길도 이런저런 적성이나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교직에 진출할 수 있는 사범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소설에서 이 과정이 상당히 디테일한데, 아이가 공부를 잘하니 생각 같아선 서울대 정도를 보내어서 집안을 일으킬 대들보로 육성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서울에 유학(留學)을 보내면 비용이 많이 들고, 고등고시 준비를 시키려니 또 냉정하게 그 정도는 안 되는 것 같아 집안 어르신들이나 선생님들이 고민을 하시는 겁니다. 결국 지역 명문인 경북대학교에 진학하는데 이조차도 엄한길의 모교(고등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처음 있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엄한길은 비록 평이 아주 좋은 학교는 아니었으나 재학 내내 반 1등,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기에 수재 대접을 받았습니다(사실 인문계생이 종고를 갔으니 양민학살이라 좀 그렇긴 하죠). 그러나 엄한길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객관화가 잘 된 현실적인 타입이었기에 자신의 자질에 대해 과도한 환상은 품지 않는 행보를 내내 보입니다. 이런 분은 어느 직장에서도 티 안 내고 로우 키(low key)로 자기 할 일만 건실히 하는 분들이죠.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이해를 못하는데, 아직도 영남지역에서는 로컬 명문 국공립대학을 인서울 대학교들보다 더 높게 치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현실은, 기업에서 인재를 뽑을 때도 그렇고, 수능입결도그렇고 이미 인서울 대학들이 영남 지거국을 멀찌감치 따돌린지 오래입니다. 큰 우려를 부르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수도권 특정 지역을 벨트 삼아 반도체 클러스터가 형성되었으므로 (인재가 그리 몰리는 현실을) 마냥 탓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이 소설에서 묘사된 상황의 배경에는 과거의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 두고 싶네요. 

언젠가 크게 출세할 청년들이 있고, 자신의 이런저런 한계 때문에 시골 고향에 머물러야 하는 처녀들이 (과거에는) 있었습니다. 특히 저무렵엔 여성들이 대학 나와 봐야 비서직, 타이피스트 등 말고는 할 일이 마땅치 않던 산업 구조의 모순이 있었으므로, 예를 들어 p80 이하에 나오는 한길과 조신혜 사이의 다소 안타까운 스토리 같은 것도 있는 거죠. 당시에는 아마 저런 일들이 많았을 겁니다. p95에 나오는 조신혜의 대사는 정말로 마음에 안 들지만(이름값을 못하는!) 얼마나 마음이 그리 기울었으면 저런 말까지 꺼내겠나 싶어서 안쓰럽기도 했네요.  

엄한길이 나온 안덕고등학교 같은 곳은 인구밀도가 낮은 벽촌에 설치되는 이른바 종합고등학교이며 중고교를 겸하는 시스템이죠. 다만 p94에 나오듯 조신혜는 종고 갈 실력보다는 나았지만 사랑하는 한길 오빠 때문에 구태여 안덕고를 간 겁니다. 당시 영남지역 인문계 고교라면 철저히 남녀 분리였겠는데 둘이 모교가 같아진 건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한길은 절친 오동석에게 사실 제법 좋은 기회를 제안받습니다만 번번이 거절합니다. 이런 걸 보면 오동석도 참 어지간한 사람이고, 엄한길은 다른 이유에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석은 대학 때에는 친구 입주과외 자리를 알아 봐 주고(p100. 청출어람이라고, 가르친 형제 둘 다 변호사, 의사로 출세했습니다), 한길이 교편을 잡은 후엔 인맥을 동원하기까지 해서 또 친구 앞길을 틔워 주려 하니 말입니다. 물론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긴 하지만요. p112에 처음 나오는 차인애는 저 뒤 p242에도 나오듯 나중에 교장이 됩니다. 

엄한길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소년이었습니다. 이 소설에 제목이 인용되는 고전 작품만 추려도 리포트 한 편 분량은 되겠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조신혜도 책을 좋아합니다. 자고로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이 없습니다. 한길의 필명이라며 동석이 선사한 필명 혹은 아호인 효계(曉鷄)도 그에게 썩 잘 어울립니다. 동석처럼 어려서 풍요롭게 자란 사람들이 보면 꼭 자신도 살고 남도 사는 멋진 방식으로 사회 생활을 합니다. 나만 잘사는 사람은 알고보면 하수입니다. 어렵게 산 사람 중 벼락출세한 이들이 보면 꼭 인색하고 못산 게 한이 맺혀서인지 속물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 못된 것은 어려서 잘살았고 못살았고에 무관하게, 커서도 쓰레기짓을 하고 다닙니다. 

엄한길의 인생에는 오동석, 조신혜가 있었는가 하면 천승조 같은 이가 또 있었습니다. 엄한길이 노영수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중 가장 깊은 감정을 담은 건 천승조에 대한 것(p216, p224)이었죠. 전 사실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전폭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참 어지간하시다는 정도밖에는... 이 장편소설은 기이하게도 어느 점잖은 교장 선생님이 말도안되는 투서 한 장 때문에 졸지에 천직을 잃기 직전까지 간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과연 이 꼬이고 꼬인 사연이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될까요? 답은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을 보면 암시받을 수 있네요. 단 그 별을 보려면 도시의 탁한 하늘 아래선 안 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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