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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공법
헨리 휘튼 지음, 김현주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외교관 헨리 휘튼이 쓴 고전으로, 원제는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입니다. 대학 교재들이 이름으로 흔히 쓰는 "국제법 개론"이란 뜻이죠. 당대 미국 강단에 국제법 교과서가 여럿 있었겠으나, 유독 이 책을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한문으로 옮겨 중국인들에게 보급했고 이것이 구한말 우리 조상들에게도 알려져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하나의 준거틀을 제공했습니다. 김현주 원광대 교수가 쓴 역자 서문(즉 바로 이 인간사랑刊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양무운동 당시 공친왕(서태후의 정적이기도 했던)이 이 책 일독을 고관들에게 장려하였다고도 합니다. 이 책은 한능검 같은 시험에서 출제사항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21세기 한국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그 제목만큼은 잘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 본성은 이타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이며 매우 호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기특한 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끝에 공멸로 치닫지 않고 사전에 게임의 룰을 정하긴 한다는 점입니다. 규칙은 모두가 좋자고 만들어 놓았지만 대체로는 약자에게 당장 더 필요한 장치이며 제도입니다. 중국도 당장 서세동점의 대세 속에 일단 폭력이 아닌 말과 이치에 호소할 방법을 찾고 싶었겠으며, 한편으로는 이 양귀(羊鬼)들과 소통이 가능할 기본 원칙들, 저네들끼리 다툼을 해결하는 원리들이 어떤 모양을 갖추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겠습니다.
특이하게도 윌리엄 마틴 역 <만국공법>에는 서문이 하나 붙었는데 역자 정위량(마틴의 중국명)이 아니라 노생을 자칭하는 장사규라는 선비가 썼다고 나옵니다. 오히려 이 글이, 청말 중국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자료 구실도 합니다. 고구려가 수당 제국의 외침을 받으며 짐짓 중국군의 퇴각을 권유했을 때 흔히 쓰던 자칭 문구가 "분토(奮土)"였습니다. 이처럼 쓸모없는 땅에 뭐하러 관심을 가지시냐는 애교어린, 또 짐짓 겸손해하는 외교적 제스처죠. 그와 선명히 대비되는 게 장사규 서문(p11)의 "최혜의 지역"이라든가, "사해가 모두 있어 만국이 모두 내왕한지 말할 수 없이 오래되었다" 같은 표현입니다. 농사가 잘 되어 인구 부양력이 매우 높고 강성한 정치단위가 오래전부터 발달하여 주변 소국으로부터 경외의 대상이었다는 뜻인데 자부심이 가득 배어납니다.
반면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대한 인식은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고 왕은 재상처럼 살림을 직접 돌보며 토산이 부족하여 군함을 해외에 보내 약탈 조달했다"고 합니다. 이는 김 교수님의 자상한 역주에 의하면 <좌전>의 한 문장에 기댄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런 치밀한 점이 고전 읽어가는 독자들을 무척 행복하게 합니다. 여튼, 청조의 서생 장사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은, 중화제국 역시 황제가 재상처럼 국정을 섬세히 돌보는 치세 아래에서라야 외적의 침노를 두려워않고 국세를 사방에 떨쳤으며 백성의 삶도 윤택했다는 점입니다. 명 홍무제는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주부처럼 세심히 내정을 살폈으며, 청 강희제는 실무 지식을 자랑하기를 하급관리처럼 했는데, 그래, 이 모든 현군 성군들의 행적들도 비웃음의 대상이겠습니까? 지식인부터가 이처럼 식견이 좁고 자기객관화가 부족하니 온 나라가 망국지경까지 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이 영국 영향 하에 있다거나, 마침내 프랑스가 영국을 따라잡았다거나 하는 장사규의 기술은 기초 사실관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서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한 시기는 프랑스가 더 길고 오래되었으며 산업 혁명 전후로 잠시 역전된 걸 프랑스가 다시 추격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장사규가 러시아의 국세 쇠락을 짚는 대목에서는 차라리 실소가 나오는데, 그런 허수아비에게 청 제국은 아무르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뻬앗기고 부동항 비슷한 걸 내주어(1860년) 그들의 숙원을 해소해 주었다는 것인가요?
아무튼 이는 서문에 대한 논평에 불과하고, 지금부터 본문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어판 역자 김현주 교수는 서문에서 "공법(公法)"의 뜻을 놓고 곧 국제법(오늘날 용어로)이라고 새깁니다. 즉 "만국공법" 전체라야 국제법과 동의어가 되는 게 아니라 "공법"만으로 국제법이란 뜻이 된다는 거죠. 오늘날 공법이라 하면 사법(私法)의 반대 영역 모두를 칭하므로 헌법, 형법, 각종 절차법 등이 다 포함되므로 저 무렵 중국인들이 쓰던 관례와는 크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공법이라는 포괄적 뉘앙스의 단어 안에 국제법만을 대응시켰다는 건, 역자 윌리엄 마틴을 포함하여 중국인들이 국제법 질서(의 위력)에 대해 갖는 기대가 그만큼 컸음도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크게 다릅니다. 구한말 한국에서 활약했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한국의 호랑이")는 어느 국제법 전공자(갓 박사학위를 딴)를 두고 크게 칭찬했습니다. 청년이 어리둥절하여 영문을 묻자 박사가 대답하길 "존재하지도 않는 걸 연구한다니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인가!"라고 했다죠. 냉엄한 현실 속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에 설령 법이 있다 한들 강대국이 무시해 버리면 이를 집행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오늘날 국제법 교과서라고 하면 각종 조약과 협의체, 국제기구, 외교관 파견과 활동, 신분에 대한 프로토콜 등이 설명될 것입니다. 이 책에도 물론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당시에만 존재하던 특수한 국체(國體) 등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는데, p72를 보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예를 들어 나라들이 합병해도 각자의 주권을 잃지 않는 경우의 예를 들고, 또 잃기도 하는 예는 대영, 즉 그레이트 브리튼의 예를 듭니다. 오스트리아 이원 제국(double monarch)의 경우가 워낙 특수한 예이죠. 현재는 이런 경우(즉 전자)가 없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1차 대전 후 별개국으로 분해되었습니다. 속령이었던 체코, 슬로바키아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재미있는 게 폴란드가 처음 삼차에 걸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에 의해 분할될 때 폴란드 고유의 여러 권리는 대체로 존중되었고 다만 최고 주권만이 차르에 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 강한 폴란드인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켰고, 이에 실패하자 러시아는 그간의 제도 존중도 모두 철회하여 완전한 속방으로 삼은 건데,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비엔나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했다는 사실까지 기술되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요즘이라면 국제법 교과서보다는 외교사 등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커버할 주제이죠.
공법인데도 당시가 제국주의 체제 하 식민국이 있던 시절이므로 식민국(속국이라고 표현합니다)에서의 재산권이 본국에서 어떻게 취급되는지도 규율합니다. 또 흑인 등을 노예로 삼아 상품처럼 거래하는 건 금지된다고 선언하는데 이 책이 쓰일 무렵 미국은 아직도 남부 주에 노예제가 상존했으므로 미국인 학자 휘튼이 쓴 이 구절이 더욱 묘한 느낌을 풍깁니다. 이제는 교과서라기보다 차라리 역사 문헌이라고 봐야 할 이 책을 읽으며, 한 시절에 당연한 상식으로 통용되던 바가 세월이 지나면 이처럼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