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우크라이나 사태를 말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말하다
김선명 지음 / 뿌쉬낀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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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박사는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며 외교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를 끌어내었던 장본인입니다. 18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을 꺾기 위해 수백 년 앙숙 부르봉 왕실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로써 영국도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프랑스와 대항하는 포지션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외교혁명"이라 부릅니다.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해 준 저 사건은 전 유럽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키신저가 주도한 1970년대 초의 중국 - 미국 수교가 준 충격도 이와 맞먹지 않았을까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쳐들어간지 일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이런 사태가 마냥 오래 지속되게 할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건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헨리 키신저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발언을 내놓았는데 이 책은 한국의 김선명 뿌쉬낀하우스 원장이 그 발언들을 모아 해석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김선명 원장은 "그(=키신저)의 태도가 타당한가, 발언의 근원은 어디인가, 학문적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어디인가 등을 되짚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p16). 

전통적으로 국제정치학은 현실주의(레알폴리틱), 이상주의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현 사태가 봉합되는 건 일견 세계인의 정의감정에 반할지 모르지만 그 나름 국제정치 현실주의의 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국제정치학(의 큰 한 축)은 거의 언제나 대중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 왔습니다. 이 책에 실린 키신저의 발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대중(對中) 외교를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라(p33). 이 말을 보면 과거 그가 젊었을 때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외교를 맺었던 전례와 궤가 같습니다. 만약에, 당시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러시아(소련)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면 이 시도는 실패라고 불러 마땅했겠습니다. 책은 오히려 소련과도 군축 협정을 이끌어냈고 베트남 전쟁도 마무리짓는 등 세계적 범위에 걸쳐 데탕트를 이루는 성과를 내었다고 합니다. 의표를 찔린 소련이 순순히 나오게 했던 면이 분명 있습니다. 저때 키신저가 추구한 게 중국과 손잡고 소련에 쳐들어가자(마오의 당시 처지를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시나리오도 아닙니다)는 게 아니었고, 냉전 기류를 끊어내고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중국이 미국 패권을 위협하는 판에, 괜히 러시아를 자극하여 중국한테 붙게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달래서 미국 쪽으로 더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게, 중국과 러시아는 수백 년 숙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공산주의 진영에 속했을 때조차 싸웠고 전면전 직전까지 갔습니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대체 같은 편인 두 나라가 왜 저렇게 싸우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죠. 러시아가 위기에 몰린 지금 미국이 적절히 러시아의 체면을 지키며 사태를 마무리해 주면 지금처럼 중-러가 밀착하여 미국을 협공하는 국면은 피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인 듯합니다. "굴욕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결과가 필요합니다(p57)."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키신저의 견해가 맞을 듯한 포인트가 적어도 하나 있습니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했으려면 당시 친러 야누코비치 대통령이라도 EU의 차관을 받을 수 있게끔 서방세계가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내걸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크라이나는 (친러였던) 야누코비치 손으로 친서방 노선에 도장을 찍은 셈이기에 이후 러시아가 개입을 할 여지가 없어지며 지금 이 지경까지 올 이유도 사라지죠. 이 말이 참으로 교묘한 게, 우크라이나 편도 슬쩍 들면서 서방의 실수를 지적하기에 편파적이라거나 냉혹한 레알폴리틱 논리만 일관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결과론으로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만 적어도 이 주장은 형식논리상으로 반박할 구석을 찾기 힘듭니다. 

왜 베트남을 포기하여 공산주의를 봉쇄(contain)하지 못했는가? 답은 미국에 베트남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국익은 권력에 우선해야 한다." 문학작품 <삼총사>에도 등장하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공식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17세기에 아마 합스부르크가 난전 끝에 유럽을 통일했고 그란드 나시옹 프랑스는 없었을 겁니다. 이제 그는 묻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에 중요한가? 물론 답이 정해진 건 아닙니다. 주데텐도 영국에 중요하지 않았기에 체임벌린은 거기서 히틀러를 막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2차 대전과 영국의 패권 상실이었다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죠. 어디까지나 키신저 박사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뿐이며 크게 봐서 그 역시 미국의 국익만 최우선시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점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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