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있어요 - 세상에 혼자라고 느껴질 때,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들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안해린 옮김 / 불광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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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고뇌와 번민, 분투, 그리고 죽음까지를 지근거리에서 진지하게 관찰해 온 전문의 안목과 통찰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 크리스토프 앙드레 박사는 원래부터 의사, 심리학자였지만 임상에 "명상"이라는 과정을 처음 도입한 업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분이라고 합니다(출처: 앞 책날개). 그런 객관적인 소개 사항이 아니라고 해도 책을 읽어 보면 어떤 동양의 고승(高僧)의 법어를 연상시키는 깊이 있는 말씀들이 가득합니다. 다만 문체가 서양 스타일이고, 문장에 열정이 가득 배어난다는 게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직접 겪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이웃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사람 아닌 생명체든 옆에서 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다소 과장된 반응도 있겠으며, "남의 o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도 있듯 사람의 고통은 객관적으로 측정해 순위를 매기고 경중을 가릴 게 아닙니다. 그러나 여튼 고통은 엄연히 당사자에게 실존하며 그래서 우리는 "누군 안 힘드냐?"며 퉁명스럽게 면박을 줘서는 안 되는 거겠죠. 저자께서는 호소도 위안도 과장없이 필요한 정도로만 담백하게 나누자고 하십니다. 이 발언은 코로나19 때 더 심한 어려움을 호소한 장노년층을 염두에 둔 건데, 세대 구별 없이 칼 같이 마스크 방역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조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감기"라며 청년층이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세대간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별나다 싶게 같은 건물 거주자끼리,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끼리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소통의 확인 절차를 작은 것까지 챙기는 편인 게 서유럽, 미국인들입니다. 한국은 구태여 그러지 않는 게 어차피 어느 정도 유대가 살아 있고 급할 때 발휘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습니다(사실은 이제 그렇지도 않지만). 어차피 모두가 서로 남인 저쪽에서는 예를 들어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p61)" 같은 글귀가, 설령 해당 사항 없는 사람한테까지 엄청난 연민, 때로는 공포(나도 저리 되면 어쩌나 하는)를 부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명상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분이시라서인지 저자는 "결코, 누구도 이런 처지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주장합니다. 이것이 21세기에 우리가 공동체에서 발휘해야 할 최소한의 연대의식입니다. 관련된 에라스무스의 말도 인용되는데 출처는 책 뒤 후주 17번에 <격언집(Adages)>이라고 나오네요. 

저자는 열혈 사회주의자였으며 페미니스트였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녀의 아주 작은 몸 안에 들어있던(아마도 그랬을) 강인한 정신력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자가 더 놀란 대목은 어떤 투쟁의지보다는, 그 와중에도 동료와 시민(혹은 노동자) 권익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그 이타심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실제 이 책에 인용된 구절에서도 확연하게 그런 마음이 드러납니다. 남의 고통에 무감각해지지 말자는 이 책의 주제와도 잘 통합니다. 

p102에 인용되는 쥘 르나르는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아동문학 <홍당무>의 작가입니다. 옛날 분이라서 요즘 아이들은 자주 접하는 작가가 아닌데 사실 저희 세대도 이 작가의 작품을 구태여 읽어야 했을 정도는 아닐 만큼 너무 예전 사람이죠. 그만큼 요즘은 어린이들을 위한 양질의 컨텐츠가 많이 생산되는 세상입니다. 여튼, 이 책 저자 앙드레 박사님은 최고의 직업 상담가인 만큼(한국의 오은영 선생처럼) 이 책에서 상담가의 다양한 (발휘해야 할) 미덕과 기술(사실은 진정성이 담겨야 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 생각에 쥘 르나르에 대해 저자께서 좀 특이할 만큼 깊이 공명하신다 싶어서 한마디 적어 봤습니다. 

조르주 상드는 그 자유분방한 삶이 대번에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지만 저자는 p123에서 그녀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저자는 단언하기를 그녀가 "위로의 귀재"였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위고 신부라는 분이 나오는데 편집자주에도 나오지만 (또 문맥상으로도) 이 사람이 당대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신부"는 아니지 싶습니다. pere는 여기서는 로마 가톨릭 신부가 아니라 상드와 플로베르가 존경과 친근감을 담아 부른 일반호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지런한 작은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p167)." 이 구절은 작가 루이르네 드 포레의 문장을 앙드레 박사가 재인용한 것인데 박사님 마음도 포레의 그 감성(혹은, 깨달음)과 완전히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생명체가 개체의 생존을 유지하고, 후손을 낳아 생육, 번창하게 하려는 그 간절한 몸부림과 마음가짐은 인간이나 미물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이며 자신만 챙기려는 풍조가 이처럼 만연해서는 모두가 결국 지옥으로 빠지게 됩니다. 충만감을 받아들이고 명상에서 얻은 평안함과 가르침에 진심으로 동의하며(p195) 상호의존 상호위로의 기제를 개인과 사회에 내면화할 때 도달할 수 있는 평온과 희망의 가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해집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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