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사랑하였다
박경숙 지음 / 문이당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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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소설입니다. 생은 가볍게 살려고 작정하면 한도 없이 가벼워질 수 있지만, 의미를 챙기려고 들면 이또한 끝도 없습니다. 중용을 취하고자 들 때 이건 또 쉽냐면 그렇기는커녕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주인공 윤희림은 가슴에 불덩이가 든 여인인데, 또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타입은 아닙니다. 차라리 이 점이 그녀 삶을 그나마 덜 힘들게, 팔자를 덜 꼬이게(동네 어느 어르신의 평과는 달리) 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 서문을 보면 이십여년 전 외환위기 때 이 소설은 처음 창작되었고 후일담 보강과 일부 개작을 거쳐 다시 출간되었다고 하십니다(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더 이전인 1980년대에도 교포 소설(?)은 꽤 많았습니다(꼭 교포가 지었다는 게 아니라 교포가 주인공). 최인호씨의 <깊고 푸른 밤>이 그 대표겠으며 그외에도 김지연씨 등 실제 미국에 살던 분들이 국내 소설가들과는 꽤 다른 분위기에 독특한 메시지를 담은(혹은 생략한) 이야기들이 알게모르게 인기였습니다. 

이 소설은 1인칭 "남성" 화자가 LA에서 1번 프리웨이를 달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미국 땅이 워낙 넓다 보니(이 작품에도 새삼 그 점이 언급되죠) 그렇겠지만 저 <깊고...>류에서도 몇 번 도로를 타고 어디로 접어든다는 식의 서술이 단골처럼 등장합니다. 한국도 그때에 비하면 여러 도로가 보강되었지만 매번 그 길이 그 길이고 풍경이 단조롭기에 소설 중에서 언급되는 건 좀 드뭅니다. 왜 1인칭 화자가 남자일까, 자전적 분위기일 텐데... 하다가 이 길수라는 분이 사실은 비중이 크지 않았음을 소설을 죽 읽어 가며 알게 되네요(단, 제목과 에필로그는 확실한 그의 몫입니다). 길수는 윤희림의 기원이 어디였고 어떠했는지 객관화하여 잠시 알려 주는 장치였습니다. 중반에도 다시 잠시 나오는데 서문에서 작가가 왜 외환위기를 언급하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2023년 지금 한국에서도 자산가들이 돈 안 쓰고 엄청 몸조심하는데 IMF때 저렇게 호되게 당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진짜 "여자 나"는 윤희림이란 중년 여성인데 어렸을 때는 부잣집 딸처럼 통통하다가(이건 그 시절 기준이고 요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커가면서는 잘록하게 여자 티가 제대로 나는, 얄밉게도 귀티를 매 단계에서 다른 방법으로 꼭 티를 내는 타입입니다(계속 뚱뚱하다거나 반대로 폼 안 나게 비쩍 곤, 좋은 태생임이 잘 티 안 나는 유형도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여러 가지로 힘들(놀랍게도 불법 체류자 신분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비결이 뭘까, 물론 타고난 게 대부분이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반면 최길수는 스스로 말하듯 머슴 근성이 몸에 밴 사람인데(이름부터도 머슴 같아요. <토지>의 길상이라든가. ㅋ죄송하지만) 이런 타입도 ㅎㅎ 떠오르는 분이 있어서 읽으면서 웃었습니다. 그래도 똑똑해서 명문대 상대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갔으며, 무슨 어렸을 때 가난이 큰 상처가 된(일부 암시하는 대목이 있긴 합니다), 그 상처를 어려서 찜한 귀족 여인 헌팅으로 달래려는 미친 히스클리프나 개츠비 유형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머슴에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니 답답하지만 본인은 뭐 그게 편한가 봅니다. 

탁민영이란 천주교 신부가 간단한 외양 묘사와 함께 처음 등장했을 때 저는 인물의 이해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제가 아는 어떤 유형에 딱 대입하면서 소설 진행에 따라 조금씩만 고쳐 나갔습니다. 천주교 신부의 95% 이상은 그렇지 않은데, 아주 드물게, 키 크고 목소리 좋고 날렵하고(나이에 비해)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정색 로브에 흰 로만 칼라가 잘 어울리는 타입이 있습니다(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평가이니 신자분들은 오해 없으시길). 젊었을 때의 탤런트 태민영씨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혹은 이 분야(?) 대표 선수인 <가시나무새> 드브리카사 신부 역의 리처드 체임벌린도 떠오르네요. 

반면 윤희림은 작품을 읽으며 그 설명에 따라 애써 퍼즐을 맞춰 나가며 상상했습니다. 무슨 프리다 칼로라든가 윤심덕이라든가 아니면 윤정희(왜 하필 다 윤씨죠? 써 놓고 보니)씨라든가 윤여정씨라든가 이런 분들(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개성이 더 강렬한 셀럽들이 표준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을 적절히 버무리면 될 듯하지만 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닌, 누굴까 하고 그림이 정확하게는 안 그려지는 타입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으나 저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멋대로는 아닐 것 같기도 해서였는데, 작중에 "희림은 흔해 빠진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사실 희림은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닙니다(시대 불문). 희 자 림 자는 각각 흔한데 희림 조합은 생각보다 잘 없습니다. 심지어 윤씨 성은 희자가 특정 대 항렬이기도 한데(남녀 불문)도 그렇습니다. p148에 보면 "순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한 대목은, 탁민영 신부가 윤희림의 모친 부음을 접하며 직업적인 위로 발화, 제스처링을 작동하는 대신 아주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엉뚱하게도 자기 푸념을 하는 장면(p82)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불법체류신분이라서 일단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온다는 설명을 윤희림이 탁 신부에게 구태여 해야 하는 대목도요. 아니, 여태 일군 생활 기반이나 보유한 부동산(없을 수도) 상실 문제라든가, 한국에서 장차 영위해야 할 생활 수단이 없다든가, 이런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간관계나 이어오던 삶의 패턴이 있는데 그게 타의에 의해 중단되는 게 당사자한테는 존재 양식이 바뀌는 건데 그게 구태여 설명을 듣고서야 아 사정이 그러셨군요! 하고 나올 일이겠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아무리 미국에서의 삶이 피상적이고, 평소에 그렇게나 친절하던 이웃 백인들이 위기시에는 딱 남이 되는 판이라 해도) 그런데 상담과 고백 청취가 주 본분 중 하나일 탁 신부가 (전과는 전혀 다르게) 이처럼 나오는 건 번아웃이나 갑작스런 냉담이 아니라, 다른 동기가 있었겠습니다. p120 등 참조. 

성격도 그렇고 윤희림은 여러 남성에게 공유되는 판타지를 간직할 만큼 여성으로서의 정열과 본능을 아직 꺼뜨리지 않은 채 곡예처럼 살아가는 새 같은 존재입니다. 새가 8층에서 추락할 수도 있을까요? 아마 이십 년 전의 원작은 여기서 결말이 지어졌던 듯합니다. 이후의 "나"는 탁 신부입니다. 김순자 여사, 테레사 명혜, 레베카, 티파니, 김한식, 안순희 목사, 장 루이사(루시아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거세의 사연이 있는 우리들은 때로 탁민영처럼 명혜처럼 힘겹게 삶을 헤쳐 가고 순간의 짧은 쾌락도 즐기며 다시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니, 한 여인만을 사랑했다는(처음엔 사랑이 아니라더니) 최길수가 어쩌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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