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평점 :
2021년 부커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스와트라는 성씨를 이어 온 어느 가문의 참 슬픈 연대기입니다. 배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지만 차별과 압제, 부조리에 저항한 역사를 한 자락 간직한 어느 나라의 독자라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겠네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중력에 저항하는 국가다(p250)." 물론 지금은 아니고 1995년 시점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백인 농장주의 아들 안톤 스와트가 한 말입니다. 전세계가 모두 보편타당한 기준을 만들어 공영과 화합, 정의를 추구할 때 혼자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 낡은 가치관을 고집하며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가는 답답한 행태를 비판한 거죠. p75에는 안톤이 부친인 헤르만 알베르투스 씨와 의사에게 "1971년에 미터법으로 바뀌었는데요."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도 국제 사회의 표준에 반하는 질서를 고집하는 기성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아공 젊은 세대의 정서를 상징합니다.
이 소설은 모두 네 개의 장으로 나뉘었는데 (약간 스포일러) 각 장의 제목에 나온 인물은 그 장에서 *음을 맞이합니다. 전 처음에 이 집안의 막내딸 아모르의 비중이 클 줄 알았는데 왜 어느 챕터의 제목으로도 안 쓰였을까 궁금했습니다만 답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가장 의외의 죽음은 *번째 죽음이었고 가장 예측불허 파란만장의 삶을 산 것도 역시 그 사람이었습니다. 또 각 장은 9년 간의 간격을 띄웁니다. 첫번째 챕터는 배경이 1986년입니다(p63).
소설 제목인 "약속"은 표면적으로는, 세 아이의 엄마 레이철이 하녀 살로메와 그의 아들을 불쌍히여겨 죽으면서 추상적인 유증으로 집을 넘겨주려 했던 그 약속을 일단 뜻하긴 합니다. 이 약속은 p39, p52 등에서 되풀이되며 특히 p42에서는 "기독교인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라는 아주 강력한 워딩으로 어린 아모르가 루카스에게 다짐합니다. 사실 아이가 뭘 알았겠습니까만 아마 죽은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었겠고, 또 어쩌면 그때부터 약속이란 행위 그 천금의 무게를 비로소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p32의 "병으로 속살이 모두 빠져나가 가벼운..."이라든가, p79의 "... 벌거벗은 채 누워 있다. 그녀를 쏙 빼닮았지만 죽은 사람처럼 납빛이고 차갑다" 같은 표현이 아모르의 황량한 마음과 충격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p92, 또 p107에서는 "그 하녀는 집을 가질 수 없어"라든가, p141에서는 다시 "살로메는 그 집을 가질 수 없어"라며 스와트 가문 어른들(특히 고모)에 의해 부인되며, 특히 p143에서는 "기독교인은 자신이 한 약속을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재차 나오다가 "그러나"라는 접속사에 의해 간단히 부정됩니다. 종교까지 걸었던 언약인데도 말입니다. 여담인데, 남아공에서는 1980년대에도 상조 서비스가 저렇게 성업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104, p209에도 짧은 언급이 있습니다.
p369에는 "우리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무지개 나라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레이철 콘(결혼 전 이름)은 유대인이었고 그녀의 가문은 비교적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걸로 보입니다. 매력적인 마니, 헤르만 씨에게 반해 네덜란드 개혁교회 가문에 시집 온 레이철은 어느날 남편의 부정 사실을 알고 도로 유대교로 개종하며, 병도 이때 같이 얻었는지 이후 내내 불행히 지내다 저렇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보어인(아프리카너), 그들을 잔혹히 탄압했던 영국인, 유대인, 흑인 들 사이에는 이처럼 뚜렷한 문화적, 인종적 갈등상이 자리했었는데 이게 조화롭게 공존하면 무지개 국가이겠고 그렇지 못하면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p25에는 "보어전쟁 당시 묻힌 이백만 파운드 금"이 언급되는데 애초에 보어 전쟁이 아프리카너와 영국인 사이에 벌어졌던 것도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배권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2장에서는 헤르만 씨가 죽습니다. 시점은 1995년 6월이고 벽돌 휴대폰 같은 말에서 시대상이 드러납니다. 가장의 죽음 앞에 자녀들도 모여드는데 부친이 끝까지 그 "부어트레커 무당(p195)"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특히 아들 안톤이 분노합니다. 개혁교회 부흥사 심머스를 가리키는 건데 부어트레커가 무슨 뜻인지는 p24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알윈 심머스 씨는 여동생 라티샤와 함께 다니는데 p234를 보면 끔찍하고 추잡한 짓도 저질렀다고 나옵니다. 종교의 품위가 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 건지.
한국도 징병제 국가입니다만 이 소설에서 보듯 남아공은 1993년까지 의무복무제가 실시되었고 군인들의 임무는 흑인들의 시위 진압 비중이 상당했을 듯합니다. 안톤은 복무 중 중년 여성 시위자를 죽이게 되고 때마침 모친이 병사한 탓에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정신 착란에 가까운 상태에서 부대를 벗어나다 "페인 일병"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소설 말미에 다시 등장(?)합니다. p56에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단지 비유일 뿐이다"란 문장이 있는데, p69에서 안톤은 페인 일병더러 "당신은 단지 알레고리인가요 아니면 실존인물인가요?"라고 묻습니다. 답은 우리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아리스티드가 주인공입니다. p61에서 "그녀는 최근에 아이스링크에서 만난 소년에게 순결을 빼앗겼다"는 말이 나왔고 p120에선 마구간에서 딘 드 웨트라는 소년과 정을 통했었는데 p46에 이 소년 이름이 한 차례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딘 드 웨트와 결국 결혼하여 아이까지 두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p157에서 그녀는 "난 오빠(=안톤)한테 한 번도 명령한 적 없어!"라 항변하지만 9년 전인 p48에서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는 말을 동생 아모르에게 듣는 등 내로남불입니다. 2장 중간쯤에 이미 남편 딘에게 정이 다 떨어진 그녀는 아모르에게 자신이 제이크 무디(이 이름을 갖고 말장난까지 합니다. p213)란 사업가와 바람이 났다고 털어놓습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녀는 3장에서 또...
(스포일러)
이 스와트 집안은 딴에는 좋은 동기에서 죄의식을 덜기 위해 "고백"을 하는데 그랬다 하면 반드시 안 좋은 일이 터지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헤르만 씨는 아내에게 죄를 털어놓고 내내 흉사가 겹쳤고 딸 아리스티드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후 린딜이라는 마약상에게 죽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은 때로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 같다(p302)" 아리스티드는 여동생 아모르에게도 묘한 적대감을 어렸을 때 품었는데 이런 언니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인생 궤적이 언니와 정반대가 됩니다. p123에 "자기가 여동생을 지키는 자는 아니지 않은가!"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 창세기 카인의 대사이기도 하죠. p359에도 카인이 언급됩니다.
p243에 "우리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남아공 이주 초기 백인들의 모토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진짜 싸워야 했던 건 내면의 폭력성과 탐욕에서 비롯한 사회 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이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